한겨울 봉숭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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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상리(常理)에 어긋나거나 전에 없던 일을 보면 놀란다. 한겨울 1월인데, 집 마당에 ‘놀랄’ 일이 벌어졌다. 마당 남쪽 한구석에 봉숭아가 활짝 피어 더러는 털 보송보송한 씨방을 달고 있다. 울타리 앞에 큰 바윗돌을 세웠더니 그 사이 공간으로 겨울 볕이 내려앉아 따스한 건가. 그래도 한겨울이다. 눈 안 내리고 강추위가 오지 않는 따뜻한 겨울이라지만 봉숭아가 꽃 필 철이 아니다. 놀라운 일이다.

지구 온난화가 자연계에 뜻밖의 변화를 가져온 걸 실증이라도 함인가. 한란, 동백꽃, 수선화, 군자란, 베고니아가 피는 계절에 여름 꽃 봉숭아라니 눈앞에 대하고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6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서리가 내리는 9월까지가 봉숭아꽃의 끝물로, 무서리에도 시들어 버리는 연약한 식물이다. 떨어진 씨에서 다시 움을 틔워 삭풍 속에 핀 꽃, 경이로움을 넘어 이적(異蹟)으로 다가온다.

늦가을 이래 하늬바람 당초보다 매운 몇 번의 추위가 있었다. 서리에 비할 게 아닌 겨울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 내는 걸까. 아잇적에 마당 모퉁이에 화단을 만들고 해마다 심었던 꽃이라 봉숭아는 유난히 정겹다. 햇볕만 잘 들면 자드락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공해에 강해 도시의 화단에도 많이 심는 꽃이다. 심어 철이 되기만 하면 빨강, 하양, 주홍, 주황, 분홍의 다채로운 빛깔로 꽃을 피워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뿐이랴. 꽃잎과 이파리를 따서 손톱에 빨갛게 꽃물 들인다고 어린 누이가 얼마나 기다리던 꽃인가.

한자 이름 봉선화(鳳仙花)와 순우리말 이름 봉숭아, 이름이 둘이라서, 헷갈렸던 적이 있었다. 자랄 만큼 자라 줄기와 가지 사이에서 꽃이 피며 우뚝하게 일어서 마치 봉(鳳)의 형상을 닮다 해서 봉선화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예전엔 흔히 봉선화라 했지만 이제는 일반적으로 봉숭아라 부를 것이다. 순우리말인데 앞뒤의 ‘ㅇ’ 받침이 모음과 이어지면서 매끄럽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어 듣기에 좋은 악음(樂音)이다.

우리 가곡에서 익숙하다. ‘울밑에 서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를 ‘울밑’이라 하고, ‘처량하다’라고 우리 민족의 애틋한 정서를 그렇게 묘사했다. 음치인데도, 어릴 때 부르던 노래라 봉숭아만 보면 흥얼거리게 된다. 이런저런 유서와 사연에서 봉숭아는 우리와는 친숙한 인연의 꽃이다.

어느 해던가 몇 그루 심었더니 씨 진 자리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돋아나 여름 마당에 빼놓을 수 없는 풍물이 됐다. 씨로 번식하는데, 씨방이 익으면 저절로 터진다. 퍽 하고 탄력적으로 파열하면서 씨알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여름 땡볕에 꽃 피고 열매 맺어선지 씨를 퍼뜨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 또한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그만큼 종족보존 본능에 충실한 화초다.

요즘 마당에 내려서며 다가가게 된다. 바람이 매서운데 길 건너 파돗소리가 앞마당에 남실댄다. 너울 불러 겨울바다가 난장이 된 모양이다.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어둔 하늘을 이고 모도록 꽃을 피운 봉숭아 작은 군락은 무사한지 마음이 가 있다. 다시 놀란다. 선홍이던 빨강 꽃이 찬바람에 이울기는 했어도 꽃 진 자리에 씨방 여럿 여물어 봉곳하다. 추위 속에도 저것들을 차가운 땅 위에 터트릴 것이고, 그래서 봄을 기다리리라.

한겨울 집 마당엔 봉숭아가 한창 이모작의 성공신화를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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