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개월간 굶주리고 헐벗은 생활…비참했다
수 개월간 굶주리고 헐벗은 생활…비참했다
  • 제주신보
  • 승인 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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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1사건, 총 파업 발생
관덕정서 경찰 발포…6명 사망
1948년 4월 3일, 무장대 공격
정부, 10월 포고·11월 계엄 선포
금악 등 중산간마을 소개 작전
1948년 11월 계엄령 이후 중산간 마을의 소개작전이 이어졌다. 한림읍 금악, 명월 등 일부 마을은 해안마을로 이주했다. 1954년부터 복구와 이주 작업이 전개됐다. 사진은 4·3이재민의 원주민 복귀 기념 사진으로 1962년 이후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8년 11월 계엄령 이후 중산간 마을의 소개작전이 이어졌다. 한림읍 금악, 명월 등 일부 마을은 해안마을로 이주했다. 1954년부터 복구와 이주 작업이 전개됐다. 사진은 4·3이재민의 원주민 복귀 기념 사진으로 1962년 이후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지난 여정에서 한림여성농업인센터에서 발행한 교재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한림의 시대 상황을 살펴본 데 이어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3·1사건과 총파업, 1948년 이후의 한림의 시대 상황을 살펴본다.

3·1사건과 총파업 1948년 이후의 한림 

19473·1만세운동 28주년 기념식은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이하 민전)이 주관했다. 그러나 지역 단위에는 인민위원회가 주도해 행사를 치르는 곳이 많았다. 한림면의 3·1절 기념식은 한림국민학교에서 6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

주권 없는 민족의 설움이란 연설이나,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학생들의 구호는 그 당시 미군정에 대한 강한 민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3·1절 기념식은 한림면에서는 불상사 없이 끝났다. 그러나 제주읍 관덕정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총파업에 참가했던 한림면 부면장 양성익(梁成益·당시 한림면 공동투쟁위원장)한림면에서는 파업 안 한 곳이 없다. 어업조합, 간스메(통조림)공장, 우체국, 학교, 상점 등 전부 문을 닫았다. 당시 면장은 현주선인데, 면장만 남겨두고 20여 명 직원들은 전부 파업을 해도 출근을 했다. 간단한 민원 처리는 해줬다. 일주일 정도 파업하는데, 조병옥이 와서 직원 전원을 유치장에 가뒀다. 나는 한 보름 유치장에 있다가 벌금 물고 나왔다고 증언했다

양성익은 제주지방심리원에서 1947417, ‘포고 제2호 법령 제19호 제4위반, 벌금 1만원을 선고 받은 기록이 있다. 양성익은 처 장성년이 총 파업 사건 이후 밀항 시켜 4·3사건에는 무사했다

19473·1사건과 총파업을 거치면서 한림면의 유력한 청년들은 경찰의 검거를 피해 타 도나 일본으로 떠나는 일이 많아졌다.   

4·3사건이 진행중이던 1948년 7~8월께 사진. 중산간 마을 거주자로 추정되는 주민들과 토벌대의 모
습.

1948년 이후의 한림 

1948년 한림면의 2·7투쟁은 활발했다. 1948년 설날(구정)은 양력 210일이었다. 명월리 주민 오희규는 섣달그믐날(29)이면 동네 사람들과 윷놀이도 하고 우동도 먹고 하며 동네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시끌시끌할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젊은 사람들이 노는 곳이 없었다. ‘왓샤왓샤하며 삐라를 붙이며 돌아다는 청년들이 있었다. 삐라에는, ‘이승만 타도 단독정부 반대한다고 적혀 있던 걸 봤다. 서북청년들이 와서 청년들을 여럿 잡아가서 명절도 못 먹게 했다고 말했다.

194843일 새벽 두시, 무장대의 총 공격이 시작됐다. 무장대는 한림 지서와 한림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현주선, 국민회 한림면 총무였던 강한붕, 간부였던 김창우, 박창희 등을 습격했다. 한림여관에 투숙 중인 서청출신 경찰 김록만도 습격당했고 숙소에 있던 경찰 2명도 부상당했다

당시 한림면에 파견된 서청대원의 숙소 겸 사무실로 한림여관이 사용되고 있었다. 무장대는 한림여관에 사제 폭발물을 던져 공격했다

43일 피해 상황은 무장대 습격으로 경찰 1명 사망, 2명 부상, 민간인 6명 부상, 경찰은 무장대 1명을 생포했다

5·10 선거 후인 무장대는 1948514일 낮, 재차 한림리를 습격했다. 무장대의 목적은 한림지서를 방화하는 것이었다. 습격에 대비한 경찰들에 의해 한림지서는 무사했다

이날 습격으로 한림리에서 경찰 1명과 민간인 5명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됐다. 또한 무장대는 퇴각하면서 명월리 갯거리 오름에서 7, 금악리에서 4, 납치했던 협재리 주민 1, 귀덕리 1명 등을 추가 살해했다. 1948819일은 토벌 갔던 한림지서장 이화영이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1948년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세우기 위한 5·10선거는 한림면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한림, 옹포, 협재, 금릉, 월령은 선거가 진행이 됐다. 하지만 그 외 귀덕, 수원, 금악, 동명, 명월, 상대, 상명 사람들은 선거 전날부터 눈오름, 이달봉, 샛별오름, 정물오름 부근 굴에 가서 있다가 내려왔다. 이 마을들은 선거 자체를 하지 못했다. 당시 북제주군 을구에는 금릉리 출신 양병직이 입후보자로 1위에 당선됐다. 그러나 투표율 46.5%의 과반수 미달로 인해 당선이 무효됐다. 19485월의 분위기는 산이 이긴다가 분분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부는 제주도에 10월 포고령과 11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토벌대의 강경 초토화 작전이 실시됐다. 옛부터 글 잘하는 명월로 학자들이 많았던 명월리도 오승규, 오창규 가족들이 활동가로 있다가 집단 총살됐다. 한림면에서 명월리와 금악리는 활동가가 많은 마을로 알려져 인명피해도 컸다

194811월 계엄령 이후 중산간 마을의 소개작전도 이어졌다. 금악, 명월, 상대, 상명, 귀덕 일부, 동명 일부 마을은 해안마을로 이주하라고 했다. 금악, 명월리 사람들은 일제 때 통조림 공장 부지인 옹포리 다케나카 공장에 집단 수용됐다. 이 곳에서 5~6개월 동안 굶주리고 헐벗은 비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 당시 먹을 것이 없어 사료로 쓰던 강냉이채, 감자, 대죽뿌리, 보리채, 밀채, 전분 만들다 남은 찌꺼기, 하늘내기 뿌리, 물웃, 톳 등을 구해다가 먹었다

소개 작전 이후에는 산과 아래가 구분이 됐고, 산에서 협재리나 금릉리 마을을 습격했다면 토벌대는 보복으로 소개민이나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1949년 봄부터 명월리 고림동에 성담을 쌓고, 금악리, 상명리, 명월상동 사람들이 집단거주하며 살게 됐다. 띠를 베어다가 지붕을 덮어 길게 지은 막사에 여러 칸을 만들어 한 가족이 겨우 잠이나 잘 정도였다. 이를 함바라 불렀다. 1950년 봄엔 명월리 중동, 1951년 봄에 상명리, 1953년에 금악리가 재건됐다. 이때 쌓은 고림동 성담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한림면에서 예비검속 희생자는 정뜨르, 만벵듸와 백조일손에 묻힌 사람들을 헤아려 보면 80여 명은 될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한림면의 전체 희생자(2011년 현재, 14,032명 기준)는 귀덕 82, 대림 25, 수원 16, 한림 55, 협재 13, 금능 15, 상대 15, 동명 51, 명월 137, 상명 50, 금악 149명 등 총 608명이다.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6%,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4%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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