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일제시대 단발령 거부한 보수적인 전통 유림
(123) 일제시대 단발령 거부한 보수적인 전통 유림
  • 제주일보
  • 승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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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무신 김응평, 김응전의 종제로 고종때 정의현감
김의종, 대정향교 도훈장 역임…석전제 복구·명륜당 중건
조선 후기 문신 김의표, 제주판관 재임 시 계성사 창건해
김의헌, 제98육군병원서 군의관 소령…대정읍에 충혼비
김이경, 은계찰방 김영집의 증손…오현단 경신재서 수학
단산(바굼지 오름)을 배경으로 자리한 대정향교의 대성전, 명륜당 등 건물과 삼강오륜을 상징하는 소나무와 팽나무 모습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은
1960년대 대정향교 전경 모습.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응평金膺平1841(헌종7)~1918(일제강점기), 무신. 정의현감. 조천리 이동梨洞파 김씨, 본관 김해, 김명임金命任의 아들이다

김응전金膺銓의 종제, 자는 우공又公, 호는 농굴聾窟.

1868년 무과에 급제하고 1885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892(고종29) 임학주林鶴周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했다

김의종金宜鍾1869(고종 6)~1949, 일제 강점기의 향교 도훈장. 대정향교 직원. 자는 성숙聖淑이고 호는 하정河亭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중문면 하원리<오름-카름>에서 김여택金麗澤(1848~1929)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정향교의 직원直員으로 재임했고, 전통 유림의 습풍習風을 고집스럽게 고수한 보수적인 선비였다

대정향교의 개건에 공이 컸고 대정향교 도훈장都訓長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 단발령을 거부하고 평생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가 지은 한문비문 하정 김의종유적비遺蹟碑가 하원리 자택에 세웠는데 현재는 중문리로 옮겨져 있다

후손이나 주변 사람에게 신식 교육을 받는 것은 일제에 협력하는 길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문교육을 강조, 재래식인 한문 서당을 마련하여 훈학을 일삼았다

이런 하정의 기골은 부친 김여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부친이 고전에 능통하고 읍사邑事에 정통해 1901년 신축민란辛丑民亂으로 행정이 극도로 문란해져 관리의 권위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할 때에도 유진향장留鎭鄕長으로 있으면서 불량배의 행패를 막아 주민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1914년 대정향교의 대성전에서 석전제가 중단, 이를 복구시키려 힘썼다. 1925년 명륜당을 중건했다

하정의 아우 김우종金禹鍾도 일제하의 좌면左面(중문면) 면장을 역임하면서 올곧은 행정 솜씨를 보였다

김의종의 시시 제목= 백록담白鹿潭, 登臨半日挾飛仙반나절 나는 신선을 끼고 올랐다./潭在靑山上上邊푸른 산 맨 위에 있는 못가를/白鹿伊今何處去하얀 사슴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지/悠悠雲影一千年오랜 세월 유유히 떠도는 구름 그림자.

김의표金儀表1809(순조9)~?, 문신. 제주판관. ‘관풍안에는 이의표李儀表라고 기록돼 있다. 전라도 능주에서 출생, 자는 정오正五, 본관은 광산, 상기尙基의 아들이다

1837(헌종3)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 1854(철종5) 2월에 구재영具載榮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도임했다.

854년 가을 제주향교 구내에 계성사啓聖祠를 창건, 정헌靜軒 김용증金龍徵이 제액했다

처음 김영업金英業·신상흠愼尙欽 등이 상소하여 건립을 서둘렀고 이 해에 유생 고사징高泗澄이 상소함에 영상領相 김좌근金佐根의 도움으로 윤허를 받아냈다

1854108일 대성전에 고유제를 거행하고 9일 봉안제를 거행했다

건물구조는 태학太學에 있는 계성사의 도식을 취한 것이다.

이후 185512, 장령掌令으로 제수됐다

김의헌 충혼비.

김의헌1928-1955, 서울 태생, 98육군병원의 군의관 소령, 장염으로 순직, 대정읍 하모리 1357번지에 초라하게 남은 충혼비에 소령 김의헌하사 윤기만일병 박희덕 충혼비라고 적혀 있다

이면에는 겨레 위해 몸 바친 제 영위의 공적은 길이 조국 위해 바치오리. 단기 4288<1955> 1031일 제98병원 장병 일동이라고 새겨졌다

박희덕 일병(1931-1953)23세에 청주인으로 입대 1년 만에 간장염으로 순직했다

다른 기록에 윤기만 하사는 19529월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육군 장병들이 성금을 모아 이 비를 세워 길이 조국 위에 비치도록해드린 것이다. 이 서러운 충혼비에 의사 김순택이 시 한 수를 부쳤다.

 ‘모슬포 드센 바람에/시달려온 소나무 숲/노른곶 화장터 한 쪽에/군의 마크 뚜렷한 충혼비가 숨어있었네/전우들은 떠나 가버리고/병동조차 사라진 타향에 /순직자 셋만 덩그렁/서러움 더하라고 쓰레기에 둘려있네

아픈 병사를 돌보다가 /먼저 몸 바친 세 영위/전우들이 쌓아준 충혼비에 서려있네/반세기 너머 가시덩굴과 쓰레기로 버림 받고/잊혀진 저곳은 98육병 정문, 이쪽은 화장터/솔바람 파도소리에/외롭게 서성이는 의로운 넋들이여

이 충혼비는 제98육병의 이설 전인 1955년에 세워졌다. 육군제1훈련소가 모슬포에 자리 잡으면서 소장 산하에 직할 의무부는 연대마다 있었던 의무대와 제98육병을 통괄했다

98육병은 훈련소 지원부대격인 야전병원으로 1951년 모슬봉 남녘, 당시 대정면 하모리 1363번지에 건립됐다

1956년 폐쇄될 때까지 400여 병상의 규모로 5년간 군병력 약 50만명의 상병을 담당했었다.

의료진(군의관, 간호장교, 간호여군, 위생병 등)은 열악한 여건에서 격무로 시달렸다

원장은 대령급이었고 군의관 최대 10여명, 민간인 간호사 7명을 포함 의무요원은 40~50명이었다. 국군의무사령부는 625사변이 끝난 후인 19543월에 창설되었고 이때 군의휘장이 처음 도안되었다. 98육병은 1956년 군산으로 이설됐다.

김이경金履慶1850(철종1)~1923(일제강점기), 선비. 수구적인 한학자

자 군선君善, 호 동고東皐, 본관 나주. 화북동<벨도> ‘거로-마을에서 은계찰방銀溪察訪을 지낸 김영집金英集의 증손이다

오현단에 있던 경신재敬信齋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에 의해 영주관 자리에 제주공립보통학교를 개설하려고 하자 김이경은 영주관瀛洲館은 본시 전패를 봉안하던 곳이니 신식 학교의 개설을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 경신재와 삼천三泉서당을 통합하여 제주공립농업학교를 개설하려던 윤원구 군수의 계획에 이의경李儀景, 김기순金基淳 등과 함께 반기를 들었다

수구적인 유림들의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윤군수가 강행하자 그는 신식 학교의 개화교육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로촌으로 낙향한 후 다시는 주성州城에 나타나지 않았다

제주공립보통학교의 취학 아동이 증폭으로 1921년 학교 당국에서는 제주향교의 건물을 임시 교실로 임대할 것을 청원, 이에 양달휴梁達休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오도吾道(유교)의 병폐는 서양식 교육을 배척 거역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 것이다라는 연판장을 써서 각 유림들에게 보내어 반대하니 교실 임대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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