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에서 있었던 제주해녀항일운동
세화에서 있었던 제주해녀항일운동
  • 제주신보
  • 승인 2020.03.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영수, ㈜MD헬스케어 고문/논설위원

어릴 적부터 살던 고향집 앞 구릉지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살아왔다. 동산에 있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은 ‘동산 집’ 혹은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청와대’라고 높여 부르기도 했다. 동산 집에 사셨던 김시곤 할아버지는 저녁때 술 한 잔을 걸치고는 “동생, 이서~”하며 자주 우리 집에 마실 오셨는데, 나를 발견하면 짓궂게 숨어 있다가 “이놈, 꼬추 따 먹어부키여”하며 빰에 뽀뽀를 하셨다. 김시곤 옹께서 일제 강점기에 하도 초등학교 교사 겸 ‘혁우동맹’의 멤버로서 물질 다녀온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온 소녀 해녀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했고, 1930년대 세화 장터에서 일어난 제주해녀항일운동의 배후 핵심 주동자로 심한 고문 끝에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송구스럽게도 그분이 돌아가시고도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세화에서 있었던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1월 12일 세화 오일 장날에 절정에 이른다. 일제의 착취로 생존권을 위협받던 하도, 종달, 세화, 연평, 시흥리 등 해녀 1000여 명은 비밀 결사조직인 혁우동맹의 조직적인 지휘하에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 다구치가 구좌면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세화 장터로 총집결한다. 머리에는 흰 두건을 두르고 호미와 비창을 휘두르며 만세와 함성을 지르며 모인 이들은 장터를 점령한 후, 각 리별로 해녀들이 나와 해녀조합에 대한 불평과 죽음으로 항쟁하자는 격렬한 연설을 한다. 이어서 세화경찰주재소에 간신히 도착한 제주도사가 돌아가려 하자, 시위대는 일본도사의 차를 가로막아 실질적으로 감금시켜 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일본 순사들이 검을 뽑아서 위협하자 해녀들은 죽음으로 맞서겠다며 대응한다. 이에 겁에 질린 제주도사는 해녀들의 모든 요구 조건을 5일 내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며 감금에서 풀려난다. 일제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소식은 조선, 동아일보를 통하여 상세히 보도된다. 이후 대대적인 검색으로 100여 명이 구속되었다.

70여 년간 묻혀 있던 해녀항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부락민들이 기념사업회를 만들면서부터이다. 1990년 김시곤 옹이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자 지역 주민들은 각 리별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언론 보도, 재판 기록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후손들의 증언과 당시 생존하시며 부산 영도에 거주하셨던 김옥련 애국지사를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인터뷰도 하였다. 주민 2854명으로부터 청원서를 받기도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기념사업회는 해녀 주동자와 혁우동맹 관련자를 1996년부터 2002년까지 총 4차례 걸쳐 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신청된 혁우동맹원이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계속 거절되자 주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런 기류는 2003년 광복절 날 해녀 주동자로 김옥련, 부춘화 님, 혁우동맹 관계자로 문도배, 한원택 님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면서 바뀌었다. 이때부터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된다. 당시 기념사업회위원장으로서 10여 년간 조직을 이끄셨던 나의 부친은 걷기도 불편하고 손이 떨리는 병약한 몸임에도 몸소 공적조사서를 다 작성하셨고 돌아가는 순간까지 평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셨다. 그후 세화에 해녀박물관이 만들어지고 순차적으로 독립유공자들이 추가되면서 제주해녀항일운동은 후손들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다. “역사는 결국 후손들의 기억일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