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무신 김익철, 조천리 김덕례 아들…중림찰방 역임
조선 후기 선비 김익추, 이호동 출생…1880년 생원시에 급제
항일할동가 김익휴, 오사카서 일본에 투쟁…징역 2년 선고
김인, 조선 초기 김흡 후임 제주목사 부임…첨지중추원사 제수
▲김익렬金益烈:1921(일제강점기)~1988, 육군 중장. 국방대학원 원장, 제주도 제9연대의 연대장.
경상남도 하동 태생, 일본 후쿠지야마<福知山>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일본군 소위로 임관,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다.
1947년 5월 부산의 제5연대 소속이던 김익렬 대위는 광주의 제4연대로 전출됐다.
또 같은해 2월 1일 제3대 제9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48년 4월 3일 미명未明에 5·10 총선을 거부하는 소위 인민유격대의 무장 항쟁이 발발했다.
1948년 4월 22일 김 중령은 전투중지 전단을 살포했다. 반응이 없자 4월 27일 10시부터 행동을 개시함과 동시에 또 전단을 살포했다.
1948년 4월 28일 총책 김달삼金達三과 대정면 오지의 구억초등학교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했다.
이런 일로 1948년 5월 2일 UP통신사 서울 특파원은 “미군당국은 ‘좌익 게릴라대隊가 우익 측과 평화 교섭을 개시했고 경찰이 무장해제하고 폭압행동을 한 경관들을 처벌하는 경우에는 습격을 정지한다.’고 약속하였다.”는 기사가 나왔다.
회담 이후 총성이 멎었고 귀순자도 점차 늘었으나 이 무렵 유언비어가 난무, 반도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 당했고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는 것이고 이 일이 경찰정보로 중앙에 보고됐다.
1948년 5월 1일 11시 오라리에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기습 방화, 사망자도 나왔다.
경찰은 폭도들의 보복행위라 했고 반도들은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5월 3일 반도 2백여 명이 귀순해 오겠다고 해 9연대 병사 7명과 미군 사병 2명이 미 고문관 드루스 인솔하에 비행장에 설치한 수용소로 오는 데 무장대가 칼빈과 중기관총으로 난사, 귀순자 일부가 죽고 일부는 산으로 도망쳤다.
이때 부상당한 무장대를 드루스 중위가 치료해 주고 조사했다.
무장대는 제주경찰서(서장 문용빈文容彩:軍英 출신) 소속이라 해서 군정당국은 경찰에 진상을 물었더니, 경찰과 미군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해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하여 저지른 소행이라고 설명했다.
이후로 방화·습격이 빈번하고 입산자가 늘기 시작했다. 이런 속에서 5월 6일 정오 미 군정청이 있던 제주중학교에서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군정장관 딘 준장과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宋虎聲,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 제주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柳海辰, 제9연대장 김익렬, 제주도경찰청장 최천崔天 등이었다.
김 중령은 5월 6일자로 연대장에서 해임되고 상경, 김 중령이 김달삼과의 접촉은 적절한 절차였음이 밝혀져 불문에 부쳤다.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 김익렬은 서울 총사령부로 이동되고 1개 대대 병력뿐인 제9연대는 제11연대에 합쳐지면서 제9연대장 박진경이 제11연대장으로 보임, 제9연대는 자동 해체되었다.
김익렬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날 때 제1사단 제13연대장으로 경기도 문산에 주둔 중이었다.
그의 전장일기에 “개성開城-고랑포高浪浦 일대의 38선 부근 국군 제1사단 경계 진지에 느닷없이 북괴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나는 서울의 전황을 전할 운전병을 비롯해 상황을 들을 장병들을 격리시켜(서울 함락 소식이 사병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보초를 세워 감시하도록 했다”고 술회했다.
같은해 7월 임진강변 문산汶山 전투에서 참전 중 미군의 오폭으로 중상을 입었다.
1950년 8월 대구에 있는 훈련소의 소장으로, 9월에 제7사단 제19연대장이 되었다.
1952년 5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 동년 6월 제8사단장이 됐고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했다.
1955년 7월 제7사단장이 되고 1957년에 국방대학원 2년을 수업하고 육군본부 수송감을 거쳐 1960년 제1관구사령관, 1961년 5월 전라북도지구계엄사무소장에 임명됐다.
이어 1962년 제1군단장, 1964년 1월 육군전투병과사령관, 1967년 5월 국방대학원 원장 겸 합동참모대학 총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 1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한국시멘트공업협회 이사장, 1972년 인천제철 상임감사를 역임했다.
1988년 12월 사망하자 국립묘지에 안장. 1997년 6월 25일 미망인 최재선崔在先여사가 고인의 유품과 전장일기를 공개했다.
▲김익철金益喆:1741(영조17)~1790(정조14), 무신. 경기도 중림 찰방. 자는 남제南悌, 본관은 김해.
조천리 김덕례金德禮의 아들, 명월만호 김종보金鍾輔의 아버지이다.
김익철은 1775년(영조 51) 김광종金光宗, 홍수관洪受寬 등 62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경기도 인천의 중림찰방重林察訪을 역임했다.
아들 종보鍾輔는 함경도 함흥영咸興營의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종식鍾軾은 첨절제사를, 종집鍾輯은 명월만호를 역임한 바 있다.
▲김익추金翼樞:1850(철종1)~?, 선비. 일명 김기추金箕樞. 자는 남유南有, 본관은 경주.
제주시 이호동<오도롱>에서 태어났다.
1880년(고종1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김익휴金益休:1913(일제강점기)~1986,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 청년동맹의 항일활동. 본관은 광산.
김여찬金汝燦의 아들로 대정읍 신도리<뒌-개>에서 태어나 1923년 4월 무릉리의 개량서당 의문서숙疑問書塾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1934년 1월까지 철공소·방직공장 직공으로 근무, 1937년 5월 26일 광주지법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치렀다.
앞서 1931년에는 재일在日 제주 출신으로 구성된 동아통항조합의 회원으로 가입, 조합에서 발행하는 뉴스 전단 등을 읽으면서 현사회의 모순 불평 등을 느껴 공산주의에 흥미를 갖게 됐다.
1932년 10월 오사카에서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관서關西 섬유노동조합 와카야마<和歌山>지부’ 책임자 김희봉의 권유로 조합에 가입했다.
1932년 11월 중순 오사카로 건너가 동조합 오사카지부에서 일본 국체를 변혁시키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1933년 9월 오사카 천북군泉北郡의 소화昭和방직공장에서 강대휴姜大烋의 권유로 일본 공산당 청년동맹의 맹원으로 가입, 오사카시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때 동향의 선배이자 항일투사인 좌행옥左行玉과 연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좌행옥은 중국 상하이에 있는 국제 공산당 원동부遠東部 김단야金丹冶의 지휘를 받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목표로 활동 중이었다.
김익휴는 1986년 11월 7일 한경면 용수리에서 사망했다.
▲김인金禋:생몰년 미상, 제주목사. 1431년(세종13) 9월, 김흡金洽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434년 3월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