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다
버티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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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습관적·반사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날씨부터 체크한다. 최고기온과 최저기온, 풍속과 습도 그리고 초미세먼지와 자외선과 황사와 오존의 농도까지. 관성에는 근육이 있어 탄력으로 좀 더 나아간다. 오전 오후 날씨와 주간 날씨로 이어진다. 눈비 소식이 있으면 언제 어느 정도 내릴지, 그 확률은 몇 프로인지까지 간다. 그래야 우산도 챙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하루라는 주어진 시간을 일하며 지내기 위해 날씨에 관한 정보를 꼼꼼히 공유하는 데 길들여져 있다. 현명한 걸까, 현실에 적응하려는 계산된 점검일까. 이유는 마음 밑바닥에 자리매김해 있다. 잘 살아내려는 의식, 그래야 하루를 견뎌낸다. 말에도 중력이 있다. 버티다.

일상에 치인다고 말한다. 시간에 쫓기고, 약속에 쫓기고, 돈에 쫓기고, 눈치에 쫓기고, 너와 나의 관계에 쫓긴다. 그럼에도 심드렁한 표정 지으며 간간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제법 오랜 경험의 누적에서 가능한 생활인의 삶의 모습이다. 그렇게 하루를 혹은 일주일을 살고 나서 무심코 새어 나오는 말, 버티다.

때로 힘겹다. 동료와의 교섭에서 기분이 꼬이거나, 하고 있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해 울적하거나, 다짜고짜 달려든 격한 감정이 폭포처럼 천둥소리로 낙하하며 덮쳐올 때가 왜 없을까. 그런 격렬한 감정이 맹렬한 속도로 지나칠 때, 그 아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면 그 균형을 잡아 준 건 언제부터인가 몸에 밴 감정조절의 방어기제다. 가슴을 쓸어내릴 테다. 유비무환이란 이런 정황에 빛나는 말이다. 무탈하게 위기를 넘기고 나서 허공을 향해 외친다. 버티다.

어떤 상황에 그만큼 대처하는 능력이면 내성(耐性)이 있다 해도 무방하다. 물리적으로 한구석에 몰려 있으면 감정으로 흐르기 십상인 게 장삼이사다. 특별한 이유 없이 들이닥쳐 자신을 마구 흔들고 무너뜨리고 까부술 때, 바위 같은 침묵의 말과 남루로 강풍 앞에 선 나무로 느긋할 수 있다. 그 힘의 원천으로 솟아난 말이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버티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독한 전염병이다. 이 질병의 창궐로 인해 지구가 몸살로 나부대는 형국이다. 아시아에서 꿈틀대더니 급기야 유럽과 미 대륙을 뒤덮고 있다. 로마는 유령도시가 됐다지 않은가. 관광객으로 들끓는 콜로세움이 폐쇄됐다니 정도 이상으로 심각하다. 끝내는 WHO가 팬데믹을 선포했다. 감염병 6단계 최고등급으로 감염병 세계 대유행임을 선언한 것이다.

한국은 이미 코로나와 한바탕 사투를 벌여 온 지 두 달이 넘었다. 확진자가 크게 감소해 안정세로 돌아설 변곡점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다. 새 학년도에 입학식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개학이 또 4월로 연기됐다. 유례없는 일이다. 너나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대란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스크를 써 보지 않았다. 자랑할 일은 아니다. 이런 무장해제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머잖아 개학해 사회적 거리가 느슨해지면 큰 문제다. 없어선 안될 게 마스크다. 방콕하고 있으니, 내외가 몇 차례 받아 뒀다 우리 아이들에게 씌워 주려 한다. 노약자가 감염에 취약하다지만 내리사랑 앞에는 바이러스도 항복할 것이다. 뭘 모르는 답답한 얘기라 할지 모르나, 단단히 각오해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다. 며칠 전에 뒷심 좋은 말 하나 꺼냈다. 버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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