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제주도에 기독교 복음 전파…철저한 기독교 신자
(130) 제주도에 기독교 복음 전파…철저한 기독교 신자
  • 제주신보
  • 승인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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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원, 제주도 초기 장로…이기풍 목사와 함께 포교 힘써
 김재은, 한문 훈장…항일 모임 조설대  12동지 중 한 사람
 김재천①, 제2대 제주지방법원장…광주변호사협회장 역임
 김재천②, 제주 육영자선가…곽금초등학교 개설 초석 마련
 김재형, 한말 한경면 두모리 이장…의병 별동대 편성 활동

김재원金在元1878(고종15)~?(일제강점기), 기독교 장로(長老). 제주도 초기의 기독교 신자

제주시 이호(梨湖)백개에서 김진철과 어머니 김인애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4세부터 화북동 별도거로 마을에서 한학에 정진했다. 17세 때에 발병했는데 도내에서는 치료할 수가 없어 1897년 서울의 제중원(濟衆院)에 입원해 에비슨(O. R. Avison)의 집도로 7차에 걸친 대수술 끝에 내종(內腫) 제거에 성공했다

1900(광무4)에 완치돼 건강이 회복되자 귀향했다. 에비슨의 권유로 1897년 입원했을때 세례(洗禮)를 받고 철저한 기독교 신자로 귀의했다. 이는 김재원의 3남 김은식 장로가 쓴 김재원 장로의 양력(略歷)’에 기록돼 있다.

그는 홍순흥(洪淳興)과 함께 초기의 장로가 되었다. 1908년 이기풍(李基豊) 목사가 본도에서 최초로 선교할 때 서로 만나 포교에 힘썼고 1909년 성내(城內) 교회의 영수(領袖)가 됐다

김재은金在殷생몰년 미상. 제주시 도평동에서 태어나 한문 훈장을 지냈고 항일 모임인 조설대(朝雪臺) 12동지의 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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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천金在千①:1893(고종30)~?(분단시대), 변호사. 제주지방법원장

조천면 함덕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1921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광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광주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한때 새로 설립된 조선대학 법학과 강사로 출강했다.

194924일 최원순의 후임으로 제2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에 발령됐다

19506·25 전쟁이 발발하고 89일에는 제주도 유지(有志)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제주지방 유지 12명이 소위 인민군환영준비위원회를 몰래 조직했다는 혐의로 계엄령하의 군부에 의해 구속된 사건이었다

실은 1950714일부터 85일까지 도 총무국장 홍순원의 집에서 밀회를 개최하고 인민군 환영 준비 진행 보고, 미포섭 위원 획득, 가입금 갹출 및 기금획득, 군경관 요인 암살대 조직 및 아살 대상자에 대해 결의하고 폭동을 야기해 이적행위를 목적으로 음모를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구속된 유지 12명은 오히려 반공전선에서 빛나는 공훈을 남겼던 사람들로서 김재천(법원장), 원복범(元福範·검사장), 홍순원(洪淳元·도 총무국장),  전인홍(全仁洪·도 서무과장), 최원순(崔元淳·변호사), 김무근(金茂根·변호사), 김영희(金瀛熙·사업가), 이윤희(李允熙·사업가), 백형석(白亨錫·제주화물 사장), 이인구(李仁九·도 상공과장), 김차봉(金次鳳·제주읍장) 등이었다. 이들은 제주주정공장 창고에 갇혀 고문과 폭력으로 자백을 강요받았다

김충희(金忠熙) 도지사와 이성주(李成株)경찰국장은 이 사건의 진상 조사를 국방부장관과 내무부장관에게 진정했다.

치안국 수사과장 선우종원(鮮于宗源)이 내도해 조사한 결과 제주도계엄사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의 조작극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재천은 1952420일에 제3대 법원장 김세완(金世玩)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광주로 옮겼다.

김재천金在天②:1871(고종8)~1952, 육영 자선가, 본관 광산 김씨 세걸世傑공파다

김대현(金大鉉)3남으로 애월읍 곽지리 -오름답단이-동네에서 태어나 김기현(金沂鉉)과 신의홍(申義紅) 부부에게 입양(入養)됐다

제주향교에서 유업(遺業)을 닦으며 문묘(文廟) 석전제의 헌관을 거쳤다. 1945년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부지를 향리 9촌 조카 김재행(金在行)을 설득, 학교 부지 4476(14707)을 쾌척하여 일주도로 신작로에 곽지리와 금성리 모실-학생들이 다닐 곽금(郭錦)초등학교를 개설하는 데 초석을 마련했다

교정에는 김재천과 김재행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그는 유복한 어른으로 뽑혀 제주향교 석전제(釋奠祭) 헌관(獻官)에 선발돼 참례(參禮)했다

김재천의 시시 제목=小春 시월, 歲歲小春往復回해마다 시월 달은 가고 또 오고/ 騷人日訪讀書臺시인은 날마다 독서대를 찾는다/ 空庭黃葉雨疎下비인 뜰에 노란 잎은 비가 내리듯/ 歸雁靑天雲豁開기러기 오는 푸른 하늘엔 구름이 말끔/ 殘菊籬垣秋已去울 가에 국화 남았으나 가을은 이미 가고/ 寒風江閣雪初來강가엔 싸늘 바람 첫눈이 온다/ 此時偏感光陰暮이때에 느끼는 건 세월의 빠름 흐름/ 欲敍幽懷强擧杯그윽히 회포 풀어보려 억지로 잔을 든다

김재형金栽瀅1863(철종14)~1920(일제강점기), 의병 별동대장, 일명 철연(哲鍊)이다.

본관은 김해, 호는 남곡南谷이고 한경면 두모(頭毛)두미이장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경부(警部) 시미츠(淸水重滿)가 조선 통감부統監府에 의해 임명됐는데, 시미츠는 일본인 경찰 다수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부임 시에 정의·대정·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 우리 도민을 위협했다

제주군수(濟州郡守) 윤원구(尹元求)일본이 통신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이 섬을 떠났다

김재형은 분개하여 같은 김해 김씨 집안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역설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군대로 위협해 강제로 퇴위시켰다. 또한 우리나라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데 대해 온 국민이 분노가 분출, 국권 회복을 외치며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高仕訓·의병장), 이석공(李錫公), 김석윤(金錫允),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사였다

대정군수 김종하(金鍾河)는 관군·장정 30여  명을 동원해 경찰과 공조하면서 의병 활동을 차단, 1907228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당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졌다. 순사 강원호(康源鎬)는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지만 뿌리쳐 도주했다

190733일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 의병 참모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고 이중심, 조인관, 노상옥 등은 귀덕리 포구에서 육지부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909년 항일 의병 봉기가 대정군 영락·신평리 옹기-에서 일어나고, 같은 해 228일과 31일 두모리 두미일대에서 강력한 활동이 전개됐다

이는 마을 이장 김재형이 적극적인 의병 별동대 편성 활동을 펼쳐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김재형은 각 동별로 도통장(都統將) 1명씩 모두 6명을 선정했는데 같은 동네 고석환(高錫煥), 큰동네 고평일(高平日), 윗동네 좌용각(左用角), 알 동네 강홍정(姜弘政), 섯동네 강지범(姜之凡), 반동네 좌평세(左平世) 등이다. 그리고 통수(統首) 41명에게 227명의 부하를 각각 3명에서 11명씩 거느리게 해 군제(軍制)를 편성했다

이장 김재형은 1909210일 의병이 대오를 갖추어 두모포(頭毛浦)에 정박 중인 목포(木浦)의 배 5척을 의병 활동에 활용하도록 통제했다.  김재형은 체포돼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유배형이 선고됐다.  

20148·15 광복절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受勳)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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