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이 제주에 남긴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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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보름웃도 설화와 대향 이중섭
보름웃도 모시는 서귀포본향당
일제 신사·미신 타파 탄압 극복
이중섭, 한국전쟁 때 제주 피난
살림살이 흔적 남아 관광 명물
이중섭이 거주했던 방 내부 모습.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제주도로 피난와서 서귀포 앞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작은 집에서 거주했다.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이중섭 거리 일대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장소다. 이중섭 거리 안에는 서귀포시 지역의 으뜸 신을 모시는 서귀 본향당이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서귀 본향당의 당신(堂神)인 보름웃도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고, 서귀포 하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인 이중섭 화백의 삶을 돌아보며 두 달 동안의 서귀포역사문화탐방 여정을 마무리한다

서귀본향당으로 가는 아기자기한 골목 풍경. 아이를 업고, 다른 아이 하나를 데리고 바닷게를 잡으러 가는 엄마의 그림이다.

서귀포관광극장 노천무대와 서귀 본향당

정방동 주민센터와 이중섭 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언덕을 조금 오르면 현무암 3층 담으로 형성된 노천 무대가 있는 옛 서귀포관광극장이 나온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아주 자그마한 골목이 나타난다. 아이 하나 업고 아이 하나 데리고 바닷게를 잡으러 가는 엄마의 그림과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 골목 풍경이 앙증맞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작은 식당 건너로 서귀 본향당이란 푯말이 보인다

서귀포 본향당의 당신(堂神)의 이름은 보름웃도(또는 바람웃또)이다.

보름웃도는 본래 홍토나라 비우나라의 대가집 아들인데 어느 해 삼신산을 보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곳이 지금의 내몽고 지방인 고산국이었다.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대신의 집에 유숙하러 들어간 보름웃도는 그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대신에게 딸과의 결혼을 청했는데, 대신은 바둑을 두고 이기면 청을 들어준다 했다. 대신과의 내기 바둑을 이겨서 딸과 혼인을 하게 됐는데 첫날밤 신방에 들어가 신부의 너울을 걷어보니 얼굴에 곰보가 있는 추녀였다. 작은딸을 보고 청혼했는데, 큰딸인 고산국을 맞게 된 것이다

결혼 이후 보름웃도는 처제와 서찰을 주고받으며 눈이 맞아 제주도로 도망쳤다

고산국은 얼굴은 못생겼지만 똑똑하고 무예에 능한 여장부였다. 제주도로 도망친 것을 알게 된 고산국은 남장을 하고 무쇠 활과 화살을 들고 칼을 차 뒤쫓아왔다

고산국은 보름웃도와 동생이 보이기만 하면 바로 죽일 생각이었지만, 얼굴을 보니 그것도 못 할 노릇이었다. 자매가 고향에 돌아가면 남부끄러운 일이니 여기서 살되 고산국은 동생에게 아버지 성을 쓰지 말고 어머니 성을 쓰면 살려준다고 했다. 동생은 어머니 성을 따라 지씨가 돼 지산국이라고 불리게 됐다

고산국이 서홍마을을 차지했고, 보름웃도는 서귀동 아랫마을을 차지하고, 지산국은 나머지 동홍마을을 차지하게 됐다. 이때부터 세 지역의 땅과 물을 가르게 되었는데, 동홍과 서홍마을 간에는 혼인은 물론 밭을 매매할 수가 없게 됐다

혼인을 금한 것은 같은 부부의 자식이기 때문이고 밭 매매를 금한 것은 사이가 나쁘기 때문이다. 특히 서귀포 본향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닭이 천지를 밝게 했기 때문에 제를 지내는 날에는 닭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전통민족신앙 말살 정책으로 서귀본향당 신낭(神木) 위에 일본 천황 신사를 세워 탄압을 받았고, 해방 후 제3공화국 때는 미신 타파라는 명목으로 서귀본향당이 헐릴 위기에 직면했지만 화를 극복했다

이중섭이 제주를 떠나서 부산으로 옮긴 후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그리운 제주도 풍경’

대향 이중섭과 서귀포

불운한 시대의 천재 화가였던 대향 이중섭이 가족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 피난 와서 거주했던 집과 살림살이 흔적이 남아있는 주변은 관광지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다

집 동쪽에는 이중섭공원과 이중섭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동쪽에 있는 정방동사무소는 일제강점기에는 측우소와 신사가 있었고 해방 후에도 측우소가 있던 명당이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초상화는 4점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이웃 주민 세 사람과 집주인 송태주의 초상화다

이중섭은 그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마당에 쌓아 놓은 땔감 위에 전쟁터에서 사망한 세 사람의 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가족과 헤어진 화가는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가 19569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 중 하나다. 은지화는 담뱃갑 속의 은지에 송곳과 같은 날카로운 것으로 홈이 생기도록 드로잉을 한 일종의 선각화(線刻畵). 이중섭의 은지화를 처음 미국에 알린 사람은 아더 맥타가트(Arthru. J. Mctaggart)이다. 당시 대구미문화원 책임자였던 그는 이중섭 개인전시회에서 3점의 은지화를 구입해 뉴욕근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고 한다

2018년 기준 이중섭의 작품 수는 은지화 142점을 포함해 회화 및 소묘 365, 엽서화 88, 편지화 42, 출판미술 38, 입체 1점 등 모두 676점이다

대향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제주도로 피난와서 서귀포 앞바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작은 방에서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같은 명작을 그렸다

서귀포시는 이중섭이 살던 집 주변의 거리를 이중섭 거리로 이름 붙여 조성했다.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중섭미술관은 2002년에 지어져 이 거리 동쪽 골목길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의 거리로 유명한 서울의 인사동과 이중섭 거리가 있는 정방동은 2008년 자매결연을 맺어 감귤 판촉 행사 등 다양한 교류를 해 오고 있다. 이를 기념해 이중섭로와 인접한 지역 이름을 명동로로 부르고 있다

다음 호부터 질토래비 역사문화탐방길은 제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제주목 성밖 동녘길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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