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역경 속 두드러진 천재성…유배지에서 예술혼 불태워
(133) 역경 속 두드러진 천재성…유배지에서 예술혼 불태워
  • 제주신보
  • 승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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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대정현에 9년간 유배…세한도 등 다수 작품 남겨
 김조흠, 제주판관 부임 다음해 왜선 표도 사건으로 파직
 김종관, 무과 급제…명월만호 재임 후 정의현감에 도임
 김종만, 추자도 어업조합의 횡포에 항일 운동…징역 1년
 김종배, 노형동 출생…제주대 법과 출신 제주지방법원장
 김종보, 순조11년 한라산 등정·백록담에 마애석 조성해

김정희金正喜1786(정조10)~1856(철종7), 문신. 학자. 서화가. 유배인.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天竺古)선생 등 100여 가지에 이른다. 본관은 경주

충청도 예산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노영(魯永)의 양자가 됐다.

그는 1840(헌종6) 9월 윤상도(尹尙度) 옥사에 연루돼 제주 대정현에서 9년 동안 유배됐다

해남에서 출발, 화북포에 내려 유숙하고 익일 주성의 전 이방 고한익(高漢益) 댁에 머물렀다. 101일 대정성에 이르러 동문밖 막은골 교리(校吏) 송계순(宋啓純)의 집에 위리안치됐다.

이후 현재 추사적거지 기념관이 있는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겼다. 이곳에는 추사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세한도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을 생각하며 그렸는데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였던 후지츠카(藤塚 隣)의 수중에 있던 것을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이 찾아내 현재 개인의 손에 있다

이 완당의 세한도는 그의 대표적인 문인화이다. 세로 23, 가로 61.2, 종이 바탕에 수묵, 국보 제180호로 지정, 서울 손창근(孫昌根)이 소장 중이다

1844(헌종10) 제주도 유배지에서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살이하고 있는 자신에게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에게 답례로 그려준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발문(跋文)이 작가의 글씨로 적혀 그림 끝에 붙어 있고 다음해 이 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그곳의 명사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들이 길게 곁들여 있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과 오세창(吳世昌),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서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화면에는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화제(畵題)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는 관지(款識)를 쓰고 정희(正喜)’완당이라는 도인(圖印)을 찍어 놓았다

추사는 적거 중 많은 글씨를 남겼으며 대정향교 동재의 의문당(疑問堂) 제액, 또 좌인각(左寅閣), 영혜사(永惠祠), 송죽사(松竹祠) 등의 제액(題額)이 모두 그의 글씨이다. 또 여류 자선가 김만덕(金萬德)의 유덕을 찬양한 은광연세(恩光衍世)’도 남겼다.

김조흠金祖欽1786(정조10)~?, 문신. 제주판관. 평양에서 출생, 본관 하양, 김구(金歐)의 아들이다. 1813(순조 13)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1838(헌종 4) 2, 신의항(申義恒)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396월에 파직, 이는 왜선(倭船)이 표도되어 귀환할 때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김종관金鍾輨1786(정조10)~1861(철종12), 무신. 정의현감. 본관은 김해. 아버지는 김남수(金南秀). 조천리 태생이며 아들은 정의현감을 지낸 김기행(金沂行)이다. 1815(순조15) 무과에 급제, 1830년 명월만호를 역임하고 1848(헌종14) 강이호(康履昊)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 1850년에 퇴임했다.

김종만金鍾萬1887(고종24)~1965, 추자도 어민이 어용 어업조합의 횡포에 따른 항일활동. 본관은 김해

김윤배(金允培)의 장남으로 추자도 묵리 무기에서 태어났다

일제는 관()의 주도하에 부당한 경영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1917년 당시 추자면장 원용배(元容培)와 전남 해남 사람 윤재호(尹在浩)는 서로 결탁해 횡령한 돈을 목포에서 탕진했다. 또한 식산은행 제주지점에서 4000원을 차입했다.

김종만은 이런 일에 저항해 192672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1년의 언도가 내려졌다.

김종배金鍾培1935(일제강점기)~?, 제주지방법원장, 변호사, 본관은 연안. 제주시 노형동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논산(論山)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미일(美日)전쟁으로 일제가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충남 논산으로 이거(移居)했다. 해방 이후 귀향해 1954년 제주농업고등학교를 거쳐 1958년 제주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4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아들 김도영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를 거쳐 서울에서 변호사업(辯護士業)을 개업했다. 이는 제주(濟州)대학 출신으로 김태윤(金泰玧)에 이어 두 번째의 합격이다.

서울형사지법 판사, 서울가정법원장, 제주지방법원장을 거쳐 1995년 전주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김종보金鍾輔1762(영조38)~1850(철종1), 무신. 전주중군(全州中軍), 함경도 함흥영의 병마우후(兵馬虞候) 겸 토포사(討捕使), 본관 김해

조천리에서 가선대부 찰방인 김익철(金益喆)의 아들이다. 그는 1784(정조 8)에 이방익(李邦翼), 이광수(李光秀), 부사민(夫士敏) 등과 함께 무과에 급제, 1805(순조5) 8월 박태현(朴泰顯)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도임하고 18083월에 그만뒀다. 그의 양아들 김기유(金沂有)도 명월만호와 정의현감을 거쳤다

백록담 마애석(磨崖石) 대부분은 중앙에서 제주에 내도했던 육지인들에 의해 조성됐다. 이러한 인물들 사이로 당당히 이름을 새기고 간 제주인(濟州人)들이 있다

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출신으로 명월만호를 지냈던 김종보 일행이 그 주인공으로 1811(순조11)에 등정(登頂)하여 이름을 새겨놓았다

새겨진 글자 1자의 크기는 가로 7, 세로 8규모이다. 새겨진 간지 신미(辛未)1811(순조11)에 해당한다

김종보는 1784(정조8) 정시 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명월만호 재임기간은 1805(순조5) 8월에서 1808(순조8) 3월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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