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유언대로 한라산 품으로…영원한 ‘오름나그네’ 되다
(134) 유언대로 한라산 품으로…영원한 ‘오름나그네’ 되다
  • 제주신보
  • 승인 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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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식, 임자도 수군첨절제사 역임…흉년 때 곡식 쾌척
 김종운, 철종13년 훈장…창의문 작성해 유림 궐기 호소
 김종원, 제주시 봉개동 출신…시인·영화평론가로 활동
 김종집, 순조3년 무과 급제 후 오위장 벼슬까지 이르러
 김종철, 제주신보·제주KBS 근무…제주산악회 창립자
 김종태, 유익증 후임 정의현감…1880년대 재임 추정돼
 김종평, 제주 육군 훈련소 부소장…대정고서 수시 특강
일제강점기 때 한라산 백록담을 찾은 등산객들이 화구 안에서 동쪽 분화구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김종철은 평생 1000회 이상 한라산을 등반하는 등 한라산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일제강점기 때 한라산 백록담을 찾은 등산객들이 화구 안에서 동쪽 분화구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김종철은 평생 1000회 이상 한라산을 등반하는 등 한라산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종식金鍾軾1770(영조46)~1831(순조31), 무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전라도의 임자도(荏子島) 수군첨절제사, 본관은 김해

조천리에서 찰방 김익철(金益喆)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후(虞候) 김종보(金鍾輔)의 아우이다. 장사로 많은 돈을 벌어 당대 부호로 알려졌다

1803(순조3)에 무과에 급제했고 1811(순조11) 호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의 굶주림이 극심해지자 자신이 소유한 곡식 1090섬을 흔쾌히 내놓아 진휼(賑恤)에 이바지했다

1823년 봄에도 스스로 곡식 1300섬을 진휼에 보충하도록 그대로 내놓았다. 이로써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됐고 전라도의 임자도(荏子島) 수군첨절제사를 역임했다.

김종운金鍾運생몰년 미상, 훈장, 창의문(倡義文) 작성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에 보관 중인 계해통문(癸亥通文)1862(철종13) 10, 서광리 -광챙이강제검(姜悌儉)과 제주목 김흥채(金興采) 등의 소요 때 신촌 숙군리 유학자 이한진(李漢震)1863(철종14) 정월 창의 궐기를 도민에게 호소한 통문이다

이어 정기원(鄭岐源) 목사의 보장(報狀)과 찰리사의 별단에는 향교 장의(掌議) 이진조(李震肇), 훈장 김종운(金鍾運), 유사 고경준(高景晙)이 이를 권면해 방()을 붙이기로 했다. 김종운이 작문하고 고경준이 써서 유림에게 충효에 힘써 토란(討亂)하게 했다.

유학 이한진은 통문을 읍촌에 돌려 난괴(亂魁)20여 죄상을 성토, 충의를 효유(曉諭)했다. 끝으로 양헌수(梁憲洙) 목사가 향교에 하첩해 김종운, 이진조, 고경준, 이한진의 행적을 치하했다

김종원金鍾元1937~생존. 제주시 봉개동 출신. 시인, 영화평론가.

김종집金鍾輯1775(영조51)~1842(헌종8), 무신. 명월만호. 벼슬은 오위장에 이르렀다.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에서 찰방 김익철(金益喆)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만호 김종보(金鍾輔)와 첨사 김종식(金鍾軾)의 아우이다

1803(순조3) 무과에 급제하고 18109월 김응복(金應福)의 후임으로 부임해 18132월 그만뒀다.

김종철金鍾喆1927(일제강점기)~1995, 언론인, 산악인, 산악안전대장, 본관은 나주

제주-성안에서 의사 김유돈(金有墩)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김유돈을 김태민(金泰玟), 고명우(高明佑)와 함께 흔히 제주 현대의술의 삼걸(三傑)’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광주서중(5년제)을 졸업하고 제주북초등학교, 신성여중 교사를 거쳐 제주신보를 시작으로 제남신문, 제주KBS에서 편성부장, 편집국장 등을 두루 거쳤다

()대사관에서 195012월부터 4개월 동안 제주미국공보원 편집과장 발령을 받았고 이어 1953~1958년까지 3년 동안 보병 제39사단에서 근무했다

평생 1000회 이상 한라산을 등반(登攀)하는 등 한라산을 미치도록 사랑해 산과 더불어 살아갔다. 제주산악회를 창립한 1인이며 제주적십자 산악안전대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아 인명을 구제했다.

제주 오름 답사기(踏査記)이자 최초의 종합보고서라 할 수 있는 오름나그네3권을 펴내고 1995년에 암으로 타계했다.

시인인 그의 미망인 김순이(金順伊) 여사는 제주여성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최근까지 왕성한 집필에 여념이 없다. 부부가 함께 평생 글짓기로 좋은 글을 남겼다는 점은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김종철은 환갑이라는 고령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330여 오름을 일일이 답사하며 각 오름의 이름과 생태, 또 그 속에 담긴 사연들을 정리해 나갔다.

1990년부터 제민일보에 매주(每週) 연재한 오름나그네5년간 계속됐다. 19951월 그는 암()에 걸려 투병하면서 연재 원고를 정리해 오름나그네라는 세 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책이 나온 지 20일 만에 눈을 감았다

오름나그네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오름의 기억을 일깨웠고 오름을 보는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제주 자연의 보석이지만 지천(至賤)으로 깔려있어 귀한 줄 몰랐던 오름의 가치를 선생이 일깨워 준 것이다

한 시절 제주에서 4년을 보내며 그와 벗했던 고은(高銀) 시인은 제주의 D단조김종철에게란 시를 제주를 떠나면서 읊었는데 오름나그네뒤표지에 실려 있다

고은의 시=‘제주의 D단조-김종철에게’ : “당신을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형용사밖에는 없다./ 바하로부터 바하까지 돌아온/ G선상의 여수旅愁와 같다./ 싱그러운 눈의 외로움/등 뒤에서 비오는 소리/ 또한 햇무리 흐르는 계단의 정적/ 어떤 기쁨에라도 슬픔이 섞인다./ 그러고는 아름다운 여자를 잉태한 젊은 어머니의 해변海邊/ 오늘 저 하마유꽃(문주란)이라지도 지는 흐린 날,/ 어제의 빈 몸으로 떠나는구나./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해 한라산 1700고지 윗세-오름너머 백록담(白鹿潭)을 턱 앞에서 바라보는 곳, 진달래가 떼판으로 피어 진분홍 꽃바다를 이루는 광활한 산중 고원, 그래서 미쳐버리고 싶다고 했던 선작지-에 뿌려졌다.

김종태金鍾泰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유익증(柳益增)의 후임으로 도임했다. 후임 현감은 남계장(南啓章)이다. 추정하건대 1880년대에 재임한 듯하다.

대정고등학교 전경. 김종평은 대정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시 특강을 하며 호국정신을 강조했다.
대정고등학교 전경. 김종평은 대정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시 특강을 하며 호국정신을 강조했다.

김종평金宗平생몰년 미상. 제주 육군 제1훈련소 부소장. 육군 준장으로 예편

모슬포에서 살며 대정고 학생들에게 수시 특강으로 호국정신을 강조했다. 수년 후에 KBS제주방송국장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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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두 2020-05-20 07:35:28
평생 한라산을 사랑하고 오름을 그리워하던 김종철님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서글서글하면서도 우수가 서린 님을 생각하면 선작지왓을 무심한 듯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이 가슴에 일렁입니다. 좋은 연재글을 써주시는 김찬흡선생님과 제주신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