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맛
본디 맛
  • 제주일보
  • 승인 202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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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겨울 끝자락 즈음이면 입맛이 깔깔해 봄나물을 찾게 된다. 겨우내 신 김치에 물려선지 몸이 먼저 상큼하고 신선한 맛을 원한다. 몸속에 쌓인 춘곤증으로 나른하게 늘어질 때라 햇나물은 비타민과 같다. 과일이나 채소가 철 가리지 않고 나오는 시절이지만, 자연에서 얻은 것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비바람과 햇빛을 충분히 받은 제 철에 나오는 것이라면 최고의 식품이다.

어려서부터 편식이 심했다. 채소는 물론 잡곡밥도 도리질하던 식성이 자라면서 차츰 달라졌다. 의사 선생님은 속병에 시달리는 내게, 골고루 급하게 먹는 식습관부터 고치란다. 단맛이 날 때까지 오래 씹을 것을 권했다. 오랫동안 길든 습관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다.

오이, 파프리카, 살짝 데친 브로콜리와 양배추, 두릅까지. 몇 쪽의 과일과 곁들여 흰 접시에 차려 낸다. 울긋불긋한 색이 어우러져 아침 식욕을 한결 돋운다.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일종의 수양이라는 말을 상기하며, 오물오물 씹다 보면 쾌락 같은 게 느껴진다. 소금기 없이 한 가지씩 입에 넣고 채소 본디 맛을 오래도록 음미한다. 처음엔 향긋한 풋내로, 쌉싸래하거나 고소하다 나중에는 감칠맛이 돌았다.

요즈음 끼니때마다 채소나 과일의 진액 같은 맛을 즐긴다. 여태껏 잘 먹지 않았거나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맛이다. 산채나 밭에서 나는 채소도 되도록 심심하고 담백하게 요리를 한다. 사람마다 개성이 있듯 식물도 그만의 본디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다. 특별한 성정을 살려 어떻게 요리를 하느냐에 따라 최고의 요리가 되는가 하면, 평범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정성껏 만든 음식 앞에서 차마 젓가락질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다. 감동해서다.

걸핏하면 몸에 좋다는 것을 다투어 찾아 먹는 게 유행이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백세를 내다보는 때라 건강에 관심이 높다. 몸에 좋다거나 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지만, 그런 흐름에서 무심하게 살았다. 좋고 나쁜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먹자는 주의였다. 그게 몸이 필요한 먹거리라는 신호가 아닐까 하고.

같은 재료라도 맛은 만드는 이의 손맛을 따라간다. 무엇보다 순수한 성분이 훼손되지 않게 요리를 해야 한다. 먹는 이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예의다. 음식으로 아픈 몸을 치유한다거나 육체적으로 힘들 때,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위로를 받는 이들이 많다. 화가 났거나 몸이 불편할 때 만든 음식은, 별 이득이 없다는 걸 보면 함부로 먹을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마음이 허허로워 위로 받고 싶을 때 속 깊어 너그러운 사람이 그립다. 음식처럼 오래 씹을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그 사람 진국이라는 말을 듣고 산다면 허투루 산 삶이 아닐 것 같다. 혹 나를 그처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곤 한다.

제주 향토음식은 간결한 요리가 특징이다. 된장과 간장으로 간을 해 담백하게 먹었던 식습관이 장수의 섬이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먹는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제주에 와서 처음 먹어 본 옥돔 미역국은, 재래 간장으로 간을 한 말간 국물의 담백한 맛을 잊을 수 없다.

올여름은 더위가 길고 무덥게 이어질 거라는 예고다. 더위를 물릴 된장을 푼 자리물회며 한치물회의 본디 맛에 풍덩 빠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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