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못·선사 유적들을 숨겨둔 보물창고
마르지 않는 못·선사 유적들을 숨겨둔 보물창고
  • 제주일보
  • 승인 20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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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원당못과 선사 유적
탐라지에 나온 가물지 않는 못
오래전부터 기우제 지내던 장소
원당봉 정상에 복원 제단 있어 
기원전 3세기에 생긴 대형 마을
둥근 모양 집터 수백 기 발견돼
고인돌 등 선사 유물 다수 출토
제주삼양동유적전시관에 움집들이 전시돼 있다. 외부전시관에는 원형주거지 4동, 대형움집 1동, 방형움집 11동 등 14동이 복원돼 있어 제주 선사인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제주삼양동유적전시관에 움집들이 전시돼 있다. 외부전시관에는 원형주거지 4동, 대형움집 1동, 방형움집 11동 등 14동이 복원돼 있어 제주 선사인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원당봉 정상에는 넓은 굼부리가 있고, 굼부리 안에는 오래전부터 자연못이 있었다. 원당봉 굼부리에 문강사라는 절이 1973년 들어서기 이전까지 이곳은 논밭이었다고 전한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를 지냈던 장소인 원당못을 살펴보고 삼양동 선사 유적을 따라 걸어본다.

원당못에 복원된 기우제단.
원당못에 복원된 기우제단.

기우제단이 있는 원당못

이원진이 1653년 편찬한 탐라지에는 원당못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산봉우리에 못이 있는데 거북못이라고 한다. 못에는 거북, 자리가 있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元堂岳峯頭有池名龜池).’

개구리와 연꽃이 자라는 이곳을 오래전에는 거북못이라 불렀으나, 지금은 주민들에 의해 원당못으로 불려진다. 거북못이 상징하듯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기우제와 포제 등 마을제가 행해지던 제단이 원당봉 정상 굼부리 동쪽 사면에 복원돼 있다. 이곳에는 이웃마을인 신촌리로 통하는 길이 나 있기도 하다

원당못 제단 안에 세워진 ‘원당봉제단수리비’.
원당못 제단 안에 세워진 ‘원당봉제단수리비’.

그리고 제단 안에 세워진 비석은 이곳에 대한 과거를 어림짐작하게 한다. 단기 4288(서기 1955) 세워진 비석에는 한자로 원당봉제단수리비가 음각돼 있다. 그리고 제단을 마련하는 데 협찬한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는데 삼양과 이웃마을인 신촌리의 유력자들이 공동으로 헌금해 제단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원당봉에 세워진 세 절집에는 원당봉과 관계된 이름들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원당못에는 지금 연꽃이 만발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원당봉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  굼부리 한 편에 조성된 운동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더불어 원당봉에 서린 제주의 역사·문화가 공유되길 두 손 모은다. 마치 기우제를 올렸던 주민들의 심정으로

한반도와 교류했던 삼양동 선사 유적

기원전 3세기 무렵 제주도 곳곳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비해 현저히 커진 대규모 마을들이 등장한다. 제주시 삼양동, 용담동, 외도동, 서귀포시 화순리와 예래동 등에서 발견된 마을 유적에서는 둥근 모양의 집터 수백 기가 발견된다. 또 무덤과 제의공간, 생산공간, 저장 및 작업공간, 광장, 저수시설 등 마을의 내부공간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어 대규모 마을을 통솔할 수 있는 지배층이 나타나고 있음도 엿볼 수 있다.

청동기와 초기철기시대에 해안 근처 넓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삼양동 유적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후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또한 탐라형성기의 사회 모습을 보여주는 제주 최대의 마을 유적이다. 삼양동 유적에서 확인된 집자리만 236기이고, 그중 원형움집자리가 173기로 가장 많다.

비교적 큰 집터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입된 청동검, 옥팔찌, 옥 등이 출토돼 당시 삼양동 선사인들이 한반도를 비롯한 외부지역과도 교류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제주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간돌검(마제석검)도 발견됐고, 움무덤의 껴묻거리(부장품)도 제주도에서 처음 출토됐다. 이 부장품은 자르거나 찌르는 데 사용되는 생활용구로 또는 전쟁시의 무기로도 사용됐을 것이다. 청동이 귀한 만큼 권력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위의 상징으로 보인다.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도구로 반달처럼 생긴 반달돌칼과, 나무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갈아서 분말을 만들기 위한 가공도구인 갈판과 갈돌 그리고 홈돌도 발견됐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이곳에서 석기와 토기들을 채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66년 이곳은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돼 보존대책 없이 공사가 강행되고. 이 과정에서 매장유물들이 상당수 손실되었다 전한다

삼양동에서 발견된 고인돌.
제주시 삼양동에서 발견된 고인돌.

1986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해 고인돌을 비롯한 상당한 선사유물들을 발견했다. 수많은 집자리, 창고와 저장구덩이, 야외가마, 돌담과 배수로, 쓰레기 폐기장 등의 발굴뿐만 아니라, 중국과 왜 등과 교역한 유물 등의 발견으로, 삼양동 유적은 탐라형성기의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마을 유적임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1999년 이 일대 14000평방m사적 제416호 제주삼양동선사유적으로 지정됐던 것이다.

삼양동 유적에는 내외부 전시관을 비롯해 움집 14동이 복원돼 있다. 내부전시관에는 삼양동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설명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청동기시대 제주 선사문화의 생생한 역사를 느낄 수 있다.

외부전시관에는 원형주거지 4, 대형움집 1, 방형움집 11동 등 14동이 복원돼 제주 선사인들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지석묘와 원당봉의 5층석탑 모형 등도 전시되고 있다.

확인된 집 자리만 무려 236기가 있었던 큰 마을이 기원후 100년경 역사에서 사라졌다. 불에 타거나 전염병이 창궐한 흔적도 없이, 마을은 유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폐허가 된 것이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탐라국을 세운 핵심세력인 용담동 사람들에 의해 밀린 삼양동 사람들은 동쪽 종달리 쪽으로 쫓겨간 것일까. 종달리에서도 삼양동의 것과 유사한 유물들이 발견됐으니 이런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제주역사기행의 저자인 이영권는 고인돌 비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권력자의 무덤인 고인돌이 파괴된 숫자로도 용담동이 훨씬 많지만, 현존하는 것으로도 삼양동에는 4, 용담동에서는 9기가 남아있다.

고인돌 크기에서 용담동이 삼양동보다 크다는 것에도 역사문화적으로 우리가 풀어야 할 어떤 의미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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