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만나는 언덕
영혼이 만나는 언덕
  • 제주일보
  • 승인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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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수필가

오늘도 십자가는 늘어가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을 떠올리며 리투아니아 샤울랴이주 북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십자가 언덕으로 향한다. 흰 구름 떠다니는 푸른 하늘 아래 땡볕을 맞으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광활한 초록빛 들판이 펼쳐지며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양들은 누워 한가롭게 되새김질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기대를 안고 가다 보니, 야트막한 동산에 십자가들이 하나둘 아른거린다.

큰 나무 그늘에 작은 나무, 그 아래 이끼들이 사는 숲처럼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십자가들이 숨 쉬는 언덕이다. 초입에 들어서자 삼각뿔 모양의 기단 위에 우뚝 서 있는 참나무로 만든 높이 3.8되는 십자고상이 두 팔을 벌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 살 것이다말하는 것 같다. 로마 교황청 선물로 요한 바오로 2세가 세운 십자고상 기단에는 리투아니아인 여러분, 유럽 국가와 온 세상에 이 땅의 사람들의 믿음을 증언한 십자가 언덕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라 새겨져 있어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쌍봉낙타 혹 모양으로 길이 60, 너비 50쯤 되는 동산. 절망을 희망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 십자가를 심었던 리투아니아인 들을 생각하며, 문어발처럼 뻗은 오솔길을 한발 한발 내디딘다. 아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촘촘하게 서 있거나, 서로 기대 있거나, 쓰러져 있는 십자가와 성상들을 몸에 닿을 듯 지난다. 조악한 것부터 정교하게 조각한 것들로 크기도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나무, 철근, 자동차 번호판, 장난감 블록 등으로 만든 십자가들과 리투아니아의 전통 태양 십자가, 우리나라의 단청 십자가 등 헤아릴 수 없다.

특히 가시관을 쓴 머리에서부터 못 박힌 두 팔다리까지 온몸에 묵주, 목걸이, 성상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십자고상들,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해 허물어진 십자가들, 쓰레기 처리장을 연상케 하는 널브러진 십자가 무더기 등이 발을 붙든다. 가까이 다가서자 영혼의 소리가 들리는 듯, 이십만 개가 넘는 십자가들 어느 하나 아픔과 눈물이 아닌 것이 없다며.

첫 십자가는 1831년 반러시아 민중봉기 때 학살된 시체 없는 영혼을 위로하고, 영문도 모른 채 시베리아로 끌려간 아이, 여인, 노인들의 무사 귀환을 빌며 가족들이 세우기 시작했다. 1900년 처음 헤아린 십자가 수는 130여 개였는데, 1918년 동유럽의 옛 정치 구조가 무너지며 두 번째 독립을 선언했던 기간에는 독립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십자가가 더해졌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다시 리투아니아를 병합한 소련은 이 언덕을 쓸어 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나무 십자가는 불태우고, 금속 십자가는 고철로 사용하는가 하면, 돌과 콘크리트 십자가는 부숴 파묻었다. 그뿐 아니라 불도저로 세 차례나 이 언덕을 밀었지만, 십자가는 날로 더해갔다. KGB의 경비에도 밤에는 몰래 누군가가 십자가를 세우고 낮엔 철거하는 '십자가 전쟁'이 이어졌다. 하늘과 잇대기를 원하는 간절함을 누가 막겠는가.

1991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면서 십자가 언덕은 종교의 힘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압제의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한 성지가 되었다. 오늘날은 치유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소원 성취를 기원하며 십자가를 세우고, 걸고, 놓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십자가는 점점 늘어 가고 있다.

십자가 언덕길을 걸으며 영혼들을 위해 침묵의 기도를 드린다. 아내는 손바닥만 한 나무 십자가를 거북등 모양의 바위에 놓고, 마지막 순례가 될 거라며 가슴에 두 손을 모은다. 십자가들 틈에 세운 나의 십자가는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순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주의 음성이 들리는 듯. 마음의 십자가를 바로 세우라,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삶이니.

해가 저물어 언덕에 땅거미가 내리고 우리십자가도 멀어져 간다. 통회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람결에 부딪히는 작은 십자가와 묵주의 울림이 영혼에 스며든다. 어디선가 영혼들을 위로하듯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아코디언 선율을 타고 잔잔히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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