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에도 명맥 유지…1만8000신들을 섬기다
핍박에도 명맥 유지…1만8000신들을 섬기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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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도련동 본향당과 포제·당굿
1991년 도련동 본향당 정비
재일교포 고희수씨, 밭 희사
4·3 초토화 작전 희생 영혼
189위 모셔…위령비 건립

자연과 공존 위해 마을신 봉양
할망당·포제단 마련해 제의
생산·신앙공동체 유지 기반
미신·허식으로 매도되기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소재 본향당에서 지난해 열린 송당리 본향당굿.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소재 본향당에서 지난해 열린 송당리 본향당굿.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소재 본향당에서 지난해 열린 송당리 본향당굿.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도련1동에 있는 본향당은 마을 공동체의 신을 모시는 성소로, 이곳에서는 마을굿이 이루어진다. 본향당에 좌정한 당신은 마을 공동체의 신인만큼 마을 사람 모두의 생명과 건강 그리고 사업 번창 등을 관장한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도련1동 본향당과 18000신들의 고향인 제주의 제사 풍습을 알아본다.

도련1동 본향당에 세운 4·3위령비

오래전부터 이곳은 할망당이 있는 곳이기에 당밧으로 불려왔다. 바닷가 마을이 아닌데도 도련드르 당팟게당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형이 바닷게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이라 전한다. 재일교포 고희수씨가 당 옆의 밭 2046를 희사해 1991년 할망당을 새롭게 정비했다

도련동 본향당 신목은,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50년 된 팽나무와 수령 300년 넘은 푸조나무 두 그루이다. 세 그루의 신목 바로 남쪽에 돌담으로 쌓은 할망당의 제단이 마련됐다. 신자들은 정초에 이곳을 찾아와 과세문안(過歲問安)도 하고, 평소에도 본향을 정성스럽게 정비하고 있다.

도련1동에 본향당에 있는 4·3위령비.
도련1동에 본향당에 있는 4·3위령비.

1948114·3 소개령으로 도련의 모든 주민들은 삼양, 화북, 신촌 등지로 내려갔다. 이후 셋꼴과 웃동네 사이에 4·3성을 쌓아 거주한 주민들은 동서문으로만 출입하고, 마을 중심가에 들어선 경찰지서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실시했다.

19481212일 벌어진 초토화 작전으로 도련사람들은 많은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토벌대에 쫓겨 조천면 교래리 지경의 밤남도왓이란 곳까지 피신하기도 했다.

그 겨울의 피난생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93월 경 귀순 공작에 따라 마을에 돌아오게 됐다. 4·3에 희생된 189위 영혼들을 본향당 곁에 모신 희생자 위령비에는, 당시의 처참한 상황이 잘 그려져 있어 여기에 위령비문을 실었다.

제주섬나라에 죄 없는 피를 가득 뿌려 놓고 무심한 세월은 반세기를 유유낙낙 흐르고 있습니다. 허무하게도 가신님들의 목숨은 아직도 아픔을 치유 받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으며 그 억울한 죽음 앞에선 산과 바다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념과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죄명도 모른 채 끌려가 억울하게 숨진 한이 얼마나 깊었으면 아직도 그 날의 원혼이 마을 하늘을 떠돌고 있겠습니까. 지금 애타게 불러본들 그 영혼들의 귀에 닿을 리 없으니 속절없는 일. 고귀한 생명들을 앗아간  4·3이 너무 애통하고 분노의 마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우리들의 애절함이야 오랜 세월 쉼 없이 꿈틀대며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평생 실의에 빠져 살 수 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600여 년 전 설촌된 우리 도련마을이 평안한 영겁을 위하여 하나의 매듭이 필요한 시점임을 알았습니다. 죄 지은 자 없고 죄 없는 자들만 땅에 묻힌 이 역사의 아픔을 오래 기억하고 억울하게 쓰러져간 영혼들이 황량한 방랑길을 헤매지 않도록 하는 미래를 열고자 이곳 본향당에 가득 품은 연모의 정으로 위령비를 세웁니다. 용서만이 화해를 낳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일백팔십구위 영령이시여, 그 희생을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 빗돌을 세우고 명복을 비옵니다.(20082월 도련1동 동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세우다)’

남성중심의 포제와 여성중심의 당굿

제주선인들은 주변을 에워싼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기 위해 자연신·조상신·토지신·해신 등 많은 신들에게 끊임없이 정성을 드리며 옹골차게 삶을 이어오고 있다. 설촌 이후 선인들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할망당과 포제단을 마련해 제의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세시풍속은 생산공동체와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이 되어 왔다

조선시대에는 이형상 목사에 의해 당이 파괴되고 심방들의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와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제주 선인들의 뿌리 깊은 마을제가 미신행위이자 허례허식으로 매도되기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인들은 장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승돼 온 마을공동체 신앙으로서의 당과 포제를 주민생활 속에 깊숙하게 뿌리내리며 그 명맥을 유지시켜 왔던 것이다

당굿은 오랜 기간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주선인들의 제천행사이며 마을축제이다. 국가종교로서 장려됐던 고려의 불교가 조선시대에서는 억불정책의 시행으로 무속신앙과 서로 영향을 끼치며 유지·전승됐을 것이다.

18000신들의 고향인 제주에는 할망당으로 산에는 산신당, 바다에는 해신당, 마을에는 본향당이 있다. 본향당이란 마을마다 있는 신당(神堂)으로, 송당 본향당·와흘 본향당·수산 본향당·월평 다라쿳당 등이 제주도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이다. 손자의 무슨 말이라도 들어주는 사람이 할망이다. 또한 설문대할망, 삼신할망, 조왕할망이 상징하듯 할망은 신격화 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 도처의 마을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할망당을 모셨고, 어려움이 있을 때면 수시로 할망당을 찾아가 속내의 한 많은 사연들을 털어놓곤 했다. 그런 맥락으로 할망당을 영혼의 주민센터에 비유하기도 한다

정월에는 마을 수호신에게 인사를 드리는 신과세제, 음력 2월에는 영등신을 모시는 영등제, 한여름에는 우마의 번성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백중제(마불림제), 9월과 10월에는 1년 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시만국대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칠성제, 바다 수호신에게 비는 용왕제, 산신제, 풀무고사제 등 다양한 형태의 굿과 제의가 행해졌다

조선후기 유교정책이 강력하게 펼쳐지면서 유교식 제사인 포제는 남성중심으로, 기존의 당굿은 여성중심으로 나눠 행해졌다. 그러나 와흘리 등 일부지역에서는 남녀가 함께 어우러져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가 그대로 유지됐다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는 한라산신제를 국가제사로 건의해 제의로 치렀다. 그는 제주의 신당과 불교사찰을 130여 곳이나 파괴했던 지방관이었음에도, 토속신앙의 뿌리가 깊었던 제주사회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제주선인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조선정부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제주선인의 토속신앙 행위는 조선시대 유교정책 속에 포용돼 유지됐던 셈이다.

포제단은 사람과 사물에게 재해를 주는 포신에게, 액을 막고 복을 줄 것을 비는 제단이다. 서울과 제주도 두 곳에 있었는데, 서울서는 마보단(馬步壇)에서 지냈다고 한다. 포제 시 말이나 꿩의 소리가 들리면 길조라 여기고, ··닭 소리가 들리면 흉조라 여겼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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