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당시 희생된 김호진 편집국장 "정부 수립 후 첫 언론인 희생"
4.3당시 희생된 김호진 편집국장 "정부 수립 후 첫 언론인 희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제주언론학회 주최 4.3세미나서 고영철 명예교수 주제발표...지속적인 생애 연구 필요
제주언론학회와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달 31일 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제주언론학회와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달 31일 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김호진 전 제주신보(현 제주일보) 편집국장이 4·3당시 희생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희생당한 사례라는 주장이 나왔다.

㈔제주언론학회(회장 최낙진)와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지난달 31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개혁제주시민포럼 대표)는 이날 주제 발표에서 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의 죽음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 언론사상 첫 번째로 희생당한 언론인”이라고 밝혔다.

1948년 4·3이 발생할 당시 제주신보 2대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김호진(1920~1948)은 그해 10월 무장대 총책(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대정부 선전 포고문과 호소문을 제주신보사에서 인쇄해줬다는 혐의로 계엄당국에 구속돼 처형됐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공무국(윤전국) 간부 손모씨와 양모씨도 처형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됐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제주신보사를 수시로 출입했고, 1948년 12월에는 신문사를 강제 접수했다.

서청은 1년 동안 제주신보를 점령하면서 그동안 발행됐던 신문과 각종 서류가 분실되면서 제주 언론사의 기록에 대한 공백을 야기했다.

고 명예교수는 “4·3당시 인쇄된 ‘호소문’과 ‘포고문’ 두 개는 김호진 국장이 인쇄해준 삐라가 확실해 보인다”며 “삐라가 언제 뿌려졌는지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각종 문헌조사 결과, 김호진은 조수인·정기준·고봉효 등과 함께 1945년 11월 중순경 제주시 남문로에 있는 한 인쇄소에서 ‘백록일보’를 창간했고, 이 신문은 1회 발간을 끝으로 제주신보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통합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고 명예교수는 “그가 무슨 죄로 어떻게 처형당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1945년 8월 15일부터 1949년 3월까지의 국내 20개 중앙지가 보도한 4·3사건 관련 기사들을 분석했지만 이에 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 명예교수는 “1948년 봄 김진호가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임명되기까지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고, 각종 문헌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며 그에 대한 생애 연구가 쉽지 않았다고 피력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는 4·3당시 이덕구 명의로 발표됐다는 유인물(불온 삐라)에 대한 실체적 근거가 부족하고, 이를 소개한 4·3무장투쟁사 저자 김봉현은 4·3이 일어나기 전 일본으로 피신해 4·3을 체험하지 않아서 실체적 진실과 객관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한편 정부가 발행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는 김호진 당시 편집국장이 1948년 가을 9연대 본부가 주둔한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을 기록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제1세션에서는 이문교 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전 언론인)이 '제주지역 방송의 4·3프로그램 현황 분석'에 대해 발표했다. 제2 세션에서는 정용복 박사가 '유튜브는 어떻게 제주4·3의 기억을 불러오는가?'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