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본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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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바보는 어리석고 멍청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는 어디까지인지 기준이 모호하다. “그것도 못해, 이 바보야.” 하면 욕인데, “그이는 딸바보예요.” 하면 욕도 속된 낱말도 아니다. 딸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딸을 사랑하는 엄마나 아빠다. 아들이 누이를 편애한다고 불만을 터뜨릴지 모른다.

사실 바보는 멋대로 써선 안되는 말이다. 비슷하게 쓰이는 말들을 보면 바보란 말이 자극적으로 예민한 말임을 재인식하게 될 것이다.

등신, 병신, 팔푼이, 칠푼이, 노망, 멍청이, 멍텅구리, 귓것, 쪼다…. 어리석어 구실을 못하거나, 뭐라 해도 반응이 무뎌 어리벙벙하다든지, 정신이 흐릿해 일을 제대로 판단,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바보다. 마구 써선 안될 말이다. 어지간하면 수더분하다고 넘어가는데, ‘무던하지’ 못하니 바보라 낮춰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귓것·쪼다’에서는 표준어에 없는 정감 같은 게 느껴진다. “공부는 잘하면서 아니, 그것도 못하니? 이 쪼다야.” 이 반어법은 스스럼없이 오가면서 앳되고 풋풋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가. 특히 ‘귓것’은 친근한 사이에 간간이 쓰이는 말이다. “아이들도 다할 줄 아는데 그것도 못하냐? 요 귓것아.” 악의 없이 순진한 성정이 녹아 있는 말임을 실감할 것이다. 제주 사투리에는 제주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 놓은 정신문화의 견고한 축적이 담겨 있다.

늙어 간다를 익어 간다로 표현하는 역동적 진행에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너울 치다가 집채 같은 파도로 몰아닥치는 시대의 조류(潮流) 앞에 초긴장하게 됨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순간순간 바보가 돼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키운다.

산행할 때, 어느 지점까지 가겠다고 작정하면 설령 몸이 따라 주지 않아도 기어이 거기까지 간다. 이젠 늙었는데 나이도 잊고 앞만 보고 가는 것이다.

분별심이라곤 없다. 귓것, 쪼다 영락없는 바보가 아닌가. 수치나 시간을 정해 놓고 거기 도달하는 데만 집중하니 자연히 바보가 되고 만다. 그렇게 수치나 시간에 집착해 매달리다 보면 나중엔 몸도 정신도 무리하게 되고 컨디션이 바닥이 돼 버린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인데도, 어리마리하게 하던 대로 그냥 계속하려고 든다. 오랫동안 편하게 살아서 그런 것일까, 변화를 두려워함일까. 나이 먹을수록 “어이구, 이 바보 천치야.” 하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일이 잦아진다. 하지만 귓것, 쪼다, 바보가 어쩌면 인생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엇나간 생각에 촉이 꽂힐 때가 있곤 한다.

나는 늘그막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신이 귓것이고 쪼다, 바보임을 알게 된 진짜 바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멋쩍고 무의미하게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약간 이가 안 맞는, 얼빠진 소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영묘(英妙)하기도 어렵지만, 바보 되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물론 입장이나 처지에 따라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의 크기나 빛깔이 다른 스펙트럼을 띠고 나타나겠지만, 요즘 어수선한 사안들을 놓고 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법조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변죽만 울리거나 미풍으로 살랑거리다 말 것이면 차라리 바보가 돼 보는 건 어떨까. 호통쳐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바보답게 눌러 참고 한마디 하면 어떨지, 담론의 본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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