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많은 마을…그 안에 담긴 다양한 역사의 흔적
물이 많은 마을…그 안에 담긴 다양한 역사의 흔적
  • 제주일보
  • 승인 20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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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듸가름·당카름·지새왓·중수리 등 곳곳에 제주어 지명
홍달훈·고경준 등 마을 명예 드높인 문과 급제자 배출
수산 저수지와 물메오름. 수산 저수지는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한 농업용 저수지다.
수산 저수지와 물메오름. 수산 저수지는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한 농업용 저수지다.

수산리(水山里)는 정겨운 제주어 이름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 중심인 큰동네, 할망당이 있던 당카름, 수산봉 아래 동네인 오름카름, 넓은 밭들로 둘러싸인 벵듸가름, 마치 운해(雲海)의 여()처럼 보이는 동네라는 의미를 담은 여이에서 변음한 예원동으로 나뉜다.

마을의 역사문화가 담긴 다양한 지명들

예원동(禮園洞)은 북쪽에 예동산이란 지명이 있어 예동산또는 새카름(新設洞)’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예원동(禮園洞)으로 부르고 있다. 병뒤가름으로도 불리는 번대동은, 수산저수지를 조성할 때 수몰지구 70여 호의 철거민 중 일부가 옮겨서 형성된 마을이다. 수산리와 하귀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번대동은 평평하다번듸혹은 벵듸에서 유래하였고, 1960년대 이후 설촌된 마을이다.

여러 가름들을 굽어보는 수산봉 바로 동남쪽 기슭 호반에는 천연기념물 제441호로 지정된 곰솔이 마을의 연륜을 말해주듯 고고하게 서 있다. 조방장(助防將) 우영()과 서부장(徐部將) 집터 또는 서부장 동산이라는 지명도 있다. 조방장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애월진성 등 9진의 우두머리 벼슬이고, 우영은 자그마한 밭을 말하는 제주어이다. 부장은 종6품 벼슬로 군관을 지칭하는 직책이다.

수산리는 예전부터 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수산리는 예전부터 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옛날 장정들이 화살을 날렸던 사장밭과 사장굴, 마을 사당(祠堂)이 있던 자그마한 밭인 사당우영, 통신수단인 수산망 연대와 관련된 밭인 연디왓, 개인의 수명과 집안의 안녕을 관장하는 제석신(帝釋神)을 모셔 제석굿을 하던 제석동산, 폐허가 된 절집으로 추정되는 지새(기와의 제주어)가 발견된 지새왓, 게다가 중숫가름이란 지명도 있다.

중수()라는 제주어를 다시 찾은 기쁨도 크다. 중수리는 위아래 짝이 잘 돌아가도록 맷돌 가운데 구멍에 세우는 쇠나 나무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의미를 담은 중숫가름은 맷돌의 중심부처럼 마을의 요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머리를 빗는 참빗처럼 생긴 지형인 쳉빗왓은 수산저수지를 조성하면서 물에 잠겨버린 동네의 이름이다.

또한, 솟대왓이란 지명도 있다. 고을의 성역이었던 소도(蘇塗)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솟대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선양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 혹은 급제자의 집에 높이 세우던 붉은 장대이다. 장대 끝에는 푸른 칠을 한 나무로 만든 용을 달았다. 솟대를 세워 마을의 명예를 드높인 인물들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수산리 출신 중 문과 급제자로는 다음에 소개할 홍달훈과 고경준 등이 있다.

수산리 예원동 표석.
수산리 예원동 표석.

갑인년(1794) 흉년에 치룬 과거 급제자 홍달훈

홍달훈은 1756년 애월읍 수산리(물메, 물미)에서 홍수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94년 갑인년 전후 제주 전역에 몰아친 흉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제주선인들을 위무하고자 정조대왕이 보낸 순무어사 심낙수가 내도하여 과거 시험장을 열고는, 문과에 7명과 무과에 10명을 뽑았다.

이때 홍달훈은 승치삼천(騬馳三千·좋은말 3000마리)이란 부제로 좋은 성적을 거둬 급제하였다.

17953월 식년문과에서도 급제한 홍달훈은 사헌부 장령과 병조좌랑을 거쳐, 전라도 장성군의 청암찰방과 경상도 풍기군의 창락찰방을 역임하였다.

수산리에는 홍유학 우영이란 지명도 있다. 유학(幼學)이란 벼슬을 하지 아니한 유생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도 수산리에는 홍씨 성을 지닌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수산리가 낳은 판관 고경준

1839년 수산리의 오름가름에서 태어나서 15세에 노형동 너븐드르(廣坪) 현씨 집안에 장가든 고경준은, 고향과 처가를 오가며 귤림서원에서 공부하였다.

문과별시에서 을과(乙科)로 뽑힌 그는 1865년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같은 해, 고종임금이 친림하여 글을 짓게 한바, 고경준이 지은 글이 최고 수작으로 뽑혀 그의 문장이 중앙에도 알려졌다.

부사과(副司果)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전라도사(全羅都事), 강원도 원주의 보안찰방, 예조좌랑 등을 거쳐 1883년부터 2년간 제주판관으로 재직했다.

고경준은 제주판관 재임 중, 이조판서 김상현에게 올린 근조상십사(謹條上十事)’라는 상소문을 통해 제주 선비들이 한성시나 호남시를 보기 위해 출륙하는 번거로움과 경비를 줄여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고경준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훼철된 삼성사 창건을 주도하고 제주향교 명륜당을 개수, 향현사 유허비의 건립 등 유적의 보존과 수호에도 앞장섰다.

향사당 중수기, 삼성묘 중수기, 향현사 유허비명 등 그의 해박한 지식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189759세로 서거한 이후, 그의 생애를 기리는 선정비가 삼성사와 화북 비석거리 등에 세워졌다.

고경준 부친 고비문 탁본. 사진=백종진 제공.
고경준 부친 고비문 탁본. 사진=백종진 제공.

대제학과 목사가 남긴 도내 유일의 고비문(古碑文)

수산저수지 방향에서 물메오름으로 오르는 중턱 전망 좋은 곳 한편에는 제주판관을 지낸 고경준의 선친 묘가 자리잡고 있다.

선친묘의 고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김상현(金尙鉉)이 지은 글이다. 조선의 대제학이 남긴 비문으로는 이 고비문이 본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비문은 제주목사 홍규(洪圭)의 붓글씨로, 이 역시 목사의 글씨로는 본도에서 유일하다 전한다. 고경준이 한양에 있을 때 10년간 대재학 김상현의 집에 머물러 학문을 주고받았던 인연으로 후일 이 글을 마련해준 것이다.

제주목사 홍규는 188412월 도임하고 18865월 제주를 떠났다. 이 비문은 같은 시기에 홍규 목사와 더불어 판관으로 재직했던 고경준이 제주에서 행정 일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홍규 목사가 제주에서 시행한 각면훈장설치절목(各面訓長設置節目)은 제주도 각 면에 훈장을 두어 교육에 종사토록 하는 규약으로 제주민을 훈학하고자 하는 홍규 목사의 애민관이 담겨있는 문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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