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특별법 개정과 이행기(移行期) 정의(正義)
4·3특별법 개정과 이행기(移行期) 정의(正義)
  • 제주일보
  • 승인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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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비평가/논설위원

소설(小雪)을 지나며 칼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차별 법 금지, 낙태 금지, 국가보안법 철폐, 세월호 진상규명, 재개발 피해 보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1인 시위대들이 장사진을 쳤다. “제주도의 간절한 염원이다. 4·3특별법 개정하라.”라는 피켓을 든 팔순 무렵의 ‘문재헌’ 씨가 매일 국회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이다. 세상에 불쌍하고 한 많은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코로나 정국 속에서 버스운전을 하다 얼마 전 직장마저 그만둬야 했던 그는 4·3사건 희생자의 유족으로 그렇게 매일 국회 앞에 서있다.

유족 이석봉 씨도 인천에서부터 두어 번 전철을 갈아타고 국회를 찾는다. 재경4·3유족청년회 김동욱 부회장은 유족 분들이 몸이 아파서 국회로 갈 수 없다며 연락을 주실 때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4·3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려 제주에서 올라온 4·3유족회, 재경 4·3유족회, 4·3연구소, 제주4·3범국민위원회, 제주4·3특별법 개정 쟁취를 위한 공동행동 등 수많은 이들이 함께 피켓을 든 게 벌써 5주째다.

루티 타이텔(Ruti Teitel)은 ‘이행기(移行期)의 정의(正義)’라고 하여 정치체제가 전쟁이나 독재 상태를 벗어나 평화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과거 체제하에서 자행된 전쟁범죄 국가테러, 인권범죄 가담자를 어떻게 처리하고, 만행의 피해자를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이행기 이후의 정치 사회 발전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했다.(“Transitional Justice Genealogy”, 2003.) 이러한 정의와 관련해 유엔 보고서도 사법적·비사법적 조치, 그리고 여러 수준의 국제적 개입(또는 간섭 배제)과 개별적 기소, 배상, 진실규명, 제도개혁, 인적청산, 또는 이런 여러 조치들의 혼합 등을 밝히고 있다.(U.N. Security Council 2004)

희생자와 유족들의 염원을 담은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안’은 민주화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이행기 정의’를 구현하는 법안이 아닐 수 없다.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규명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이제는 인권과 평화, 화해 등의 상생을 위한 구체적 조처를 취해야만 할 단계다. 이전 법안에서 빠졌던 피해보상의 근거 규정, 적법한 절차 없이 징역형이나 사형 선고를 받은 2530명의 군사재판 무효화 명시 등을 새 법안은 담고 있다. 2017년 12월 처음 발의된 개정안이 논의도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가 이제 다시 전면개정안이 상정된 것이다. 일부개정이 아니라 기존 조문의 3분의 2 이상을 개정하는 ‘전부개정안’이므로 절차와 과정이 조금 복잡한 듯하다. 그런데 이 법안은 지금 국회 행정안전원회 법안소위에서 배·보상 문제를 두고 진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한다.

제주 4·3사건으로 당시 3만의 제주도민만 희생을 당한 것은 아니다. 4·3과 관련을 맺는 수많은 이들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4·3의 진상을 드러내려 했다는 이유 등으로 평생 고통을 받아왔다. 재일교포와 가족을 간첩으로 조작하기도 하고, 4·3의 진상을 밝히려 한 소설가를 고문하고, 연좌제로 묶어 수많은 유족들의 목숨 줄을 옥죄고, 진상규명을 부르짖는 민주화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정의롭지 못했던 국가를 유지했다.

4·3이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 역사에 바른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피해자나 유족 분들은 70여 년을 기다렸다. 이제 국가가 그에 대한 마땅한 조처를 취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이행기 정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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