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채비
겨울 채비
  • 제주일보
  • 승인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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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이른 김장을 했다. 우연히 강원도 고랭지 배추 농가와 연결이 돼 서둘렀다. 동생이 고향에서 보낸 고춧가루에 마늘을 빻고, 강화도에서 김장용 생새우를 사 냉동으로 보내 주었다. 포장을 뜯으며 친정엄마 같은 손길에 가슴이 아릿했다. 쌀 한 포대 들여놓고 김치냉장고 가득 채웠으니, 겨울 채비는 다 된 셈이라 든든하고 느긋하다.

김치를 아이들에게 택배로 보내고, 모처럼 엄마 노릇 한 것 같아 흐뭇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에게 늘 아쉬움과 미안함을 갖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서 걸핏하면 반찬이며 이것저것 퍼 나르는 남의 집 부모들을 보며, 내심 측은하고 안쓰러웠다. 고생스럽게 하지 말라 사서 먹어도 된다지만,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김장만큼은 내 손으로 해주고 싶다. 후일 나처럼 어머니의 김치를 그리워할 수 있을까 하는, 그 맛은 힘들 때 영혼을 위로하는 소울푸드다.

전에는 동치미며 파김치, 깍두기, 섞박지까지. 골고루 버무려 넣었다. 한때 배추 백 포기를 김칫독에 담아 마당 귀퉁이에 묻었다.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의 김치냉장고 못지않은 저장 방법으로 널리 쓰였다. 한여름까지 맛이 변하지 않고, 묵은지를 오래 먹을 수 있었다. 과학으로 발효된 김치냉장고에서 숙성된 맛이, 땅에 묻었던 항아리의 자연 숙성 맛보다 못한 것 같다.

요즈음은 김치를 많이 먹지 않는다. 사철 배추가 나오고 한꺼번에 많이 담지 않거니와, 입맛이 서구적으로 변한 면도 있다. 간편식이나 사 먹는 반찬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도 김치를 가끔 사 먹는다. 몸이 고단하거나 여름 배추가 맛이 없을 때다. 맛이 괜찮았다. 그뿐 아니다. 식품 전문기업에서 다양하게 완제품이 나온다. 구태여 집에서 번잡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든다. 식구도 단출한데 걸핏하면 남아 버리는 일이 잦고, 환경오염과 낭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는 초겨울이 되면 김장을 서둘렀다. 시골이나 도시 할 것 없이 김장하느라 바빴다. 겨우내 주 반찬인 김장은 한국인에겐 큰 행사처럼 여기던 일이다. 바쁜 도시인은 웬만하면 사 먹거나, 주문 김치로 편한 생활을 즐기는 가정이 해마다 늘어간다고 한다. 김장하는 날 이웃과 품앗이 하며 떡을 나누던 시골도 예전 같지 않단다. 인구 감소와 노령인구가 많은 탓도 있을 것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김치. 발효식품이자 완벽한 건강식품으로 알려져, 즐겨 먹는 외국인이 많다. 고춧가루 벌건 김치를 손으로 죽죽 찢어 호호 불며 엄지 척하는 모습을 흔하게 본다. 한 번 맛 들이면 쉽게 끊기 어려운 결정적인 맛, 그게 김치의 마력이다.

세계 먹거리 시장에서 K푸드가 주목받고 있다. 그중에 전통음식인 김치는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식품이 됐다. 완벽한 영양식품인 김치 종주국인 한국에서 김장 문화가 점점 시들해 지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만의 고유 전통의 맛, 맥을 이어 가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

해마다 김장 나눔 행사가 종교계며 여러 사회단체에서 열리고 있다. 혼자 사는 노인이나 결손가정, 어려운 이웃에겐 이런 봉사 활동은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힘이 될 것이다. 한 포대의 쌀과 한 통의 김치만으로도 든든한 겨울나기 양식이 된다. 어려운 시절 작은 것이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은 행복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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