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수첩
해묵은 수첩
  • 제주일보
  • 승인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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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새해엔 매사에 무심히 보내려고 한다. 애써 무엇을 해보려는 덧없는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소한 계획조차 끝내 빈손이 되고 마는 연말 손익계산서엔 결국 남는 게 없었다. 곧 후회와 아쉬움으로 보내는 세밑이 되곤 했다.

그때그때 다가오는 대로 별다름 없는 일상이 돼도 괜찮다. 생활은 대부분 비슷한 반복의 연속이다. 나이 듦이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 살아도 감사하다는 걸 일깨워 주는 시기가 아닐지. 가을걷이로 쌓아 놓은 곳간에 양식이 풍족하지 않아도, 정신의 곳간이 텅 비어 허기가 찾아온다 한들, 이 순간이 평화로우면 되는 것이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면 머릿속이 깊은 호수처럼 말갛다. 눈을 감고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다 오늘은 어떻게 보낼까. 집 안 살림에 몸으로 해야 할 일을 그려보고 다음은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 그 가벼움이란 무엇으로 표현할까. 하루가 텅 빈 하늘처럼 온통 여백뿐이라는 게 날아갈 듯하다.

마음이 여유로운 날 모처럼 낡은 수첩을 뒤적인다. 이름을 찾아 눈빛으로 안부를 건네자, 금세 말을 걸어올 것처럼 환한 모습이 떠오르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직하게 이름을 불러보며 그와의 인연을 떠올리고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려 본다.

누렇게 변한 종이가 해지고 잉크가 번져 남루하나 새 수첩에 옮길 생각이 없다. 스마트폰에 저장하면 간편하지만 손으로 정성껏 기록한 게 더 정감이 간다. 변색한 시간만큼 인연의 깊이가 소중해 그 속에서 퍼내고 싶지 않다. 이젠 고색창연한 시절로 되감을 수 없는 아쉬움을 함께 느끼고 있는 이들이다. 내겐 해묵어 잘 숙성된 된장 같은 인연이 담긴 수첩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며, 오래 연락이 닿지 않는 지인의 주소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있다. 한 시절을 너와 나를 넘나들며 나눴던 우정에 대한 상실감이 커, 한동안 수첩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데 매몰차게 수첩에서 지운다고, 그와의 정을 차마 끊을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뿐,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는데 함부로 지울 수 없는 게 이름이었다. 이제는 이름 위에 손을 얹고 쓰다듬을 만큼 여유가 생겨, 혼자 대답 없는 인사를 건네곤 한다. 나는 선뜻 정을 주기도 어렵지만 한번 맺으면 좀체 끊지 못하는 외곬이다.

혹 잘못 간수하다 잃어버릴까 종종 확인하고, 집을 떠날 때는 잊지 않고 가방 속에 챙겨 넣는다. 낯선 거리를 걷다 그리워 떠오르는 사람, 숫자 꾹꾹 눌러 목소리로나마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대신할 때도 있다. 힘들 때 핏줄처럼 걱정하며 위로해주던 친구와 방황의 길목에서 손잡아 주던 선배며, 삶의 멘토였던 존경하는 스승님까지. 마음의 손때가 듬뿍 묻어 견고한 인연의 끈이 됐다. 굽이굽이 걸어온 길 위에서 내 삶이 풍요롭고 따뜻했다.

잉크가 번져 희미한 이름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한번 번호를 눌러 볼까. 몇 번 망설이다 손을 놓는다. 결번이라거나 받질 않는다면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온다. 앞으로 소식이 닿지 않는 이가 늘어날 것이란 생각에 숙연하다. 새로운 인연을 맺기보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시점이다. 살다 보면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먼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이어지기도 하니까. 햇볕 좋은 봄날 마음한편 양지로 불러내, 소원했던 간극을 메우는 시간을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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