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죽어도 좋으니 애들만은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머니의 얼굴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3일 제73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을 찾은 고영자씨(80)는 공원 내 위패봉안실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의 넋을 기린 뒤 행방불명 수형인 묘역에 있는 아버지 비석에서 제를 지냈다.
고씨는 73년 전 4·3 광풍에 휘말려 가족 5명 중 어머니와 아버지, 여동생, 남동생 등 4명을 잃었다. 당시 고씨의 나이는 겨우 7살.
고씨는 “당시 군인들이 마을에 쳐들어와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많은 사람을 총으로 쏴 죽였다. 어머니가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애들만은 살려달라 했지만, 결국에는 나만 살아남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중간중간 기억이 희미한데, 이후 여동생을 등에 업고 할머니 집으로 뛰어갔다. 사방에서 불이 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너무 무서웠다. 여동생이 죽은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고씨의 아버지는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됐다. 고씨는 “폭도들이 우리 집에 오더니 젊은 사람은 해변가로 빨리 내려가야 한다면서 아버지를 강제로 데려갔고, 아버지가 도망쳐 다시 돌아오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그곳에 왜 갔냐고 물으며 끌고 갔다”고 설명했다.
고씨는 아버지가 알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고씨는 “그래도 아버지가 2년 전쯤 행방불명인 수형자 재심 청구를 통해 누명을 벗어 예년보다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며 “올해는 4·3특별법도 개정돼 유족으로서 매우 기쁘다. 희생자들의 모든 억울함이 풀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많은 비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유족들의 추모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다른 행불 수형인 가족인 고성주씨(76)는 “아버지가 총살당한 작은 아버지를 묻어주고 집에 왔는데, 경찰관들이 어디 다녀오는 것이냐며 아버지를 끌고 갔다.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는 말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고 말했다.
이순자씨(73)는 “내가 1살 때 아버지가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불명됐다고 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아 전혀 아는 게 없다”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통해 이 답답한 마음이 풀렸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