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신식 교육 선구자…의신학교 설립에 최고액 쾌척
(180) 신식 교육 선구자…의신학교 설립에 최고액 쾌척
  • 제주일보
  • 승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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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제, 여러 스승 찾아 학문 닦아…우도·구좌읍 등서 후학 양성
 부임전, 계림동지회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사후 현충원 안장
 부장환, 일본 오사카서 전협 항일 활동하다 옥고…출감 후 창업
 부정규, 을사늑약으로 국권 상실하자 고액 의연금 내 회복 도모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제주고등학교 전경. 제주고의 전신은 1907년 설립된 의신학교다. 근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부병규는 의신학교가 개설될 때 최고액의 의연금을 쾌척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노형동에 있는 제주고등학교 전경. 제주고의 전신은 1907년 설립된 의신학교다. 근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부병규는 의신학교가 개설될 때 최고액의 의연금을 쾌척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부시제夫時齊:1743(현종9)~1905(광무9), 문사.

제자를 많이 길렀다. 현 성산읍 난산리(난-미)에서 출생해 여러 선생을 찾아 학문을 닦았다. 당시 이도(吏道)가 문란했으므로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우도(牛島·소섬)와 구좌읍 하도리(별방) 등지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부시제의 시=桃源行:무릉도원을 가다/津外靑山山外津:나루터 저쪽 푸른 산 뒤에는 또 나루터/桃花流水欲欺人:복숭아꽃 떠서 흘러 사람을 속이려 한다./漁舟一葉歸何處:조각배 한 척 어디로 떠내려가든/五百年來紅雨春:500년 동안 꽃비 오는 곳을 찾아서

▲부임전夫林栓:1920(일제강점기)~1977, 일본 오사카에서 계림(鷄林)동지회 항일 활동. 광복 후에 초등 교사, 일명 부두전(夫斗栓), 본관은 제주.

1990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이에 따라서 1996년 국립 현충원(顯忠園) 즉,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부 합장됐다. 

아버지 부기남(夫基楠)과 어머니 김태규(金太圭)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산북 조천읍 북촌리 ‘뒷-개’ 55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 대학 오사카전문학교에 재학 중 1940년 5월 오사카에서 김봉각(金奉珏), 강금종(姜金鍾), 김병묵(金丙穆) 등 동지와 함께 흥아(興亞)연구소를 조직했으며 동년 5월 26일 계림동지회로 개칭해 세계 동향 연구부 책임자로 선정됐다.

1940년 4월 일본 오사카에서 고학하던 제주 출신 학생들로 비밀 조직을 결성했다. “조선 청년의 나갈 길은 오직 민족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길이다.”라고 보아 먼저 김봉각을 중심으로 흥아연구회를 조직했으나 후일 일본대학 오사카전문학교의 교포 학생을 중심으로 동년 5월 26일 계림동지회라고 이름을 바꾸어 목적 수행에 박차를 가했다. 계림이란 신라(新羅)의 다른 명칭이니 곧 조국을 가리키는 뜻이었다. 

각기 업무를 분담했는데 김봉각은 조직과 자금책을, 강금종은 교육책을, 김병목은 연락책을 맡았다. 한국 독립의 책략은 맑시즘과 삼민(三民)주의를 중심 과제로 삼되, 정치 이론은 김봉각, 사상 이론은 강금종, 문예 종교는 김병목, 세계 동향은 고봉조가 담당해 연구하기로 했다. 

동지 김봉각과 함께 첫째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식인 계층을 포섭, 마르크시즘과 삼민주의를 중심 과제로 연구할 것, 둘째 일본대학 부설 대판전문학교 관계자를 중심으로 멤버의 포섭에 노력할 것 등을 의논했다. 그리해서 본회의 비밀은 누설하지 말 것, 꼭 출석하되 시간 엄수할 것, 회의 시는 반드시 한국말로 할 것, 행동을 삼가며 주색에 빠지지 말 것, 동지의 영입은 김봉각, 강금종, 김병목, 고봉조, 한만숙, 부임전 등 6명의 전원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것, 회의 결과는 기록에 남기지 않을 것, 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로 하되 장소와 기타에 관한 것은 김봉각의 지령에 따를 것 등을 행동 신조로 삼아 각자 책임 부서를 맡게 됐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41년 2월 26일 일경에게 체포돼 동년 8월 6일 송치됐다. 그는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귀향, 향리의 북촌초등학교 교사로 출발, 표선초등학교 교감까지 역임했다. 

지난 1977년 58세 나이로 사망하자 북촌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당시까지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제주 출신 독립 유공자는 부임전을 비롯해 모두 6명이었다. 

▲부장환夫章煥:1911(일제강점기)~1988, 사업가, 일본 오사카에서 전협(全協)의 항일 활동, 광복 후에 재경 제주도민회 회장, 건국포장 수훈, 일본에서의 가명은 요시무라(吉村新一) 혹은 호시노(星野健一), 자는 자문(子文), 본관은 제주.

부병익(夫秉益)과 어머니 김종윤(金鍾允)의 4남 2녀 중 3남으로 조천읍 조천리(조천포) 2912번지에서 태어났다. 

친형인 부덕환(夫德煥·1908~1944)도 일본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부장환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중퇴하고 더욱 공부하기 위해 1931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배울 때 1932년 2월 시마나카(島中信雄)의 권유로 전협 출판 노조 오사카지부에 가입, 동 지부 위원으로 또 서남지구 오르로 지부 책임자로, 전협 간사이위원으로 활동했다. 

동년 4월 공청원(共靑員) 후카야(深谷)의 권유로 공청에 가입해 전협 출판 노조 프랙션으로 활동하던 중 1933년 6월 검거돼 동 8월에 기소되고 1935년 8월 3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오사카 동성구(東成區) 대금리정(大今里町) 619번지에 살면서 실업계에 몸을 던져 자본이 축적되자 오시마(大島) 금속주식회사를 창업해 사장이 됐다. 

조국이 광복되자 서울 영등포 소재의 조선 피혁주식회사의 관리자, 인천 소재 국제 상선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경기도 상공회의소 의원, 서울 상공회의소 의원, 대한 위재(衛材)공업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항일 운동의 경험을 살려 1948년 남북협상 당시 민족 지도자 김규식(金奎植) 선생을 모시고 38선을 넘어 평양을 다녀 온 바 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중도 우파의 김규식 노선을 따른 듯하다.

1955년 5월 제주도민회의 전신인 재경(在京) 제주도민친목회를 창립, 초대 회장에 황순하(黃舜河), 부회장에 부장환·김봉호(金鳳昊)·강명옥(康明玉)이 선출됐다. 이어 그는 제2대와 제3대 때 회장으로 추대받아 초기 도민회의 기틀을 확립했다. 특히 재경 유학생들을 위한 기숙 시설을 마련해 후진 육영에 힘썼다. 

▲부정규夫正奎:1871(고종8)~1949(분단시대), 서당 훈장, 전남 광주에서 부해(浮海)에게 한문 수학. 근대 교육 제창자, 호는 우산(愚山). 본관 제주.

조천읍 북촌리 ‘뒷-개’에서 부재능(夫才能)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도의 근대 교육이 조천 포구로부터 유입됨에 따라 이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앞섰다. 그의 장남 현재(弦齋) 부성준(夫性準·일명 근해)과 동향의 근재(勤齋) 김균배(金勻培) 등을 함께 광주로 보내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에게 맡겨 3년 동안 한문 공부를 시켰다. 

안병택은 본시 조천 태생으로 구한말 아버지 안달삼(安達三)을 따라 광주로 이거(移居), 부자 모두 당대 최고의 한학자로 알려졌다.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터득하고 있었던 부정규는 1907년 윤원구(尹元求) 제주군수에 의해 본도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義信學校·제주농업학교 전신)를 개설하게 될 때 최고액의 의연금을 냈다. 

당시 동문 밖 최고 부자라고 알려졌던 부정규가 400원이란 거금을 내자 모두 놀랐다. 제주 성안 최고 부자 송두옥(宋斗玉) 200원, 군수 윤원구도 100원밖에 내지 않았고 보통 10원 아니면 몇 10전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는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국권이 이미 일본으로 기울어짐을 통탄하면서 국권 회복 차원의 의연금이었다. 여기에서 부정규의 고귀한 지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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