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그 파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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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봄이 무르익었다. 구김살 없는 오월의 얼굴엔 생기가 넘쳐흐른다. 예제서 꽃이 화사하게 웃음 짓고 새소리 맑게 음률을 탄다. 계절의 여왕에 걸맞게 우리의 일상도 싱그럽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로나에 짓눌린 나날이 암흑의 터널을 지나가는 느낌이다. 병원행이나 피치 못할 경조사가 아니면 바깥출입을 자제한다. 이러다 보니 제법 길든 방콕생활에도 따분함이 밀려들곤 한다. 소소하게 느끼던 대면 생활을 상실하고 나서야 그 가치를 절감하며, 매사 더딘 깨달음을 재촉할밖에.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계절처럼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여러 기념일을 지정하여 사람들은 뜻깊은 시간을 보낸다. 안타깝게도 세월 따라 퇴색하는 느낌이지만, 그 바닥에 흐르는 인간의 향기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가정은 사랑을 나누는 둥지,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손을 맞잡은 노부부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며칠 전 바람 쐬러 가파도를 다녀왔다. 막내아들이 연차를 내고 어버이날을 앞당긴 나들이였다. 나는 어느 모임의 행사로 몇 년 전 가본 적이 있지만, 아내와 아들은 초행이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아내의 마음엔 작은 설렘이 일었을 테고, 내 마음엔 미안함이 스며들었고.

아홉 시에 승선하여 열한 시 반에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었다. 평일 탓인지 승객은 삼십여 명, 두세 명씩 일행을 이루었다. 뱃머리가 작은 너울을 가르며 나아갈 때 옥빛 바다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공중으로 솟아오르곤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순간이 토설하는 슬픔의 언어였다.

가파도는 바람이 풍경인 섬이란 말이 실감 났다. 제법 널따란 들판엔 청보리가 바람과 노닐면서 이삭을 여물리고 있었다. 때마침 까치 한 마리가 바람과 맞서며 힘겹게 날갯짓을 했다. 시련의 길을 터벅터벅 걷는 인간의 모습과 흡사했다. 시야를 넓히니 산방산과 형제섬이 또렷이 보였다. 멀리서는 실루엣으로 변신한 한라산이 신비로웠다.

가운데 길을 횡단한 후 바닷가를 따라 반 바퀴쯤 걷다 다시 중앙길로 돌아갔다.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이따금 만나는 하양과 분홍이 어우러진 갯무꽃이 야성미를 드러내는가 하면 샛노란 가자니아꽃은 눈길을 확 끌어당겼다. 꽃은 진선미의 총화, 눈길 없어도 자존심으로 타오른다. 해수 탓인지 잎이 누렇게 바랜 소나무들도 보였다. 안쓰러웠다. 생과 사, 오고 가는 일 함께 보라는 듯 처연했다.

오랜만에 외식하고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즐거웠다. 마른 가슴에 단비처럼 내리는 추억의 무늬였다. 돌아보니 딱히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닌데 왜 이런 나들이를 좀체 못했을까. 아마도 어려운 시절을 지나면서 논다거나 즐긴다는 말이 사치로 들앉은 탓이었을 테다. 행복을 미래에 쌓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앞날을 대비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행복일지라도 찾으며 누리라는 의미다.

되풀이하는 자연의 사계절과는 달리 인간에겐 한 번씩만 주어진다. 내 인체에 스민 겨울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엔 봄을 심으련다. 귀 기울이는 피붙이들을 고마워하고 소통하는 인연들도 감사해야겠다. 미물에게도 포근히 눈길을 주고, 절망을 밀어내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기도 하면서.

오월의 파동으로 먹구름 걷어내는 생활의 반전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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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련 2021-05-06 15:37:29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진리가 빛을 발하는 글이네요 가정의 달의 의미가 새삼 깊게 다가옵니다. 가까운 가정에서부터 행복을 만들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