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의 결별
익숙함과의 결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성건, 제주특별자치도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처장

‘40!’

낙제점이다. 아무리 못해도 70점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실망을 넘어 충격적이다. 사실 40점이나 70점이나 도긴개긴이지만 이건 너무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이다. 아내는 통쾌하다는 듯 박수치며 크게 웃는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사건(?)의 발단은 중학교 1학년인 막내아들이 학교에서 양성평등 교육을 받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내가 그렇다면 아빠의 양성평등 점수는 몇 점이냐고 물은 것이다. 내심 불안했던 나는 점수가 무슨 의미냐며 아들의 대답을 막아 보았지만 거침없이 점수가 발표된 것이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거니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식구 다섯 명 가운데 여성은 아내 한 명뿐인 우리 집에서 아내와의 가사분담에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며 근거 없는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아들은 이런 아빠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심한 배신감에 부끄러움이 섞인 이 오묘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낙제점수 못지않게 내 뒤통수를 더 따갑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집 삼 형제가 아빠의 이런 모습을 닮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기운이다. 아들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해 봤자 이미 제 발 저린 아비로서 권위에 큰 상처를 입은 상황이라 귀담아들을 리 만무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집 양성평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고 보란 듯이 실천하면서 무너진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게 시급하다.(아뿔싸! 이 상황에 가장의 권위라니, 40점에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상대적인 호강을 누리며 살았다는 누님들의 충격적인 증언들이 이어질 때마다 절대 그런 일 없었다고 반박하곤 하지만 그 증거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가 낯설거나 부자연스럽거나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그 시절 누구나 그러했듯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스며들어 익숙해진 탓이리라.

집안일 챙기고 아이들 돌보는 것은 당연히 아내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익숙함에 푹 절여져 살다 보니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밖에서는 사회복지 한다고 우쭐대고 있으니 한심하다. 아내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우리 아이들 역시 내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익숙함의 대물림으로 불평등의 씨앗이 또 하나 움틀 것이다. 데자뷔처럼 막내아들 역시 그 아들에게 40점짜리 성적표를 받으면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원망할 것이다. 소름 돋는 일이다.

나의 익숙함은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생채기로, 좋지 않은 기억들로 쌓여 가고 있다. 이 무서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집의 양성평등 뿐이랴. 우리 사회 차별과 배제, 혐오들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태껏 스스로에게만 관대했던 익숙함과 헤어지는 일이다. 작별 인사 따위는 필요 없이 매몰차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