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점!’
낙제점이다. 아무리 못해도 70점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실망을 넘어 충격적이다. 사실 40점이나 70점이나 도긴개긴이지만 이건 너무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머릿속이 백지장이다. 아내는 통쾌하다는 듯 박수치며 크게 웃는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사건(?)의 발단은 중학교 1학년인 막내아들이 학교에서 양성평등 교육을 받은 이야기를 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내가 “그렇다면 아빠의 양성평등 점수는 몇 점이냐”고 물은 것이다. 내심 불안했던 나는 점수가 무슨 의미냐며 아들의 대답을 막아 보았지만 거침없이 점수가 발표된 것이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어디 가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거니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식구 다섯 명 가운데 여성은 아내 한 명뿐인 우리 집에서 아내와의 가사분담에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나 몰라라 하며 근거 없는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아들은 이런 아빠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심한 배신감에 부끄러움이 섞인 이 오묘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낙제점수 못지않게 내 뒤통수를 더 따갑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집 삼 형제가 아빠의 이런 모습을 닮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기운이다. 아들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잔소리해 봤자 이미 제 발 저린 아비로서 권위에 큰 상처를 입은 상황이라 귀담아들을 리 만무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집 양성평등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고 보란 듯이 실천하면서 무너진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바로 세우는 게 시급하다.(아뿔싸! 이 상황에 ‘가장의 권위’라니, 40점에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상대적인 호강을 누리며 살았다는 누님들의 충격적인 증언들이 이어질 때마다 절대 그런 일 없었다고 반박하곤 하지만 그 증거는 아내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나의 태도가 낯설거나 부자연스럽거나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그 시절 누구나 그러했듯 아버지가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스며들어 익숙해진 탓이리라.
집안일 챙기고 아이들 돌보는 것은 당연히 아내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익숙함에 푹 절여져 살다 보니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밖에서는 사회복지 한다고 우쭐대고 있으니 한심하다. 아내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우리 아이들 역시 내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익숙함의 대물림으로 불평등의 씨앗이 또 하나 움틀 것이다. 데자뷔처럼 막내아들 역시 그 아들에게 40점짜리 성적표를 받으면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원망할 것이다. 소름 돋는 일이다.
나의 익숙함은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생채기로, 좋지 않은 기억들로 쌓여 가고 있다. 이 무서운 익숙함과 결별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집의 양성평등 뿐이랴. 우리 사회 차별과 배제, 혐오들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여태껏 스스로에게만 관대했던 익숙함과 헤어지는 일이다. 작별 인사 따위는 필요 없이 매몰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