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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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수필가

모처럼의 산행이다. 오르느라 숨은 가쁘고 다리마저 후들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꼭 이럴 때 걸려온 전화라니. 머뭇거리자 질기게 울어대는 바람에 뒤적뒤적 꺼내 받아보니 막내였다

어제 뭘 좀 사면서 우리 몫도 같이 샀다며 두고 가겠단다. 현관 비밀번호를 아무리 눌러도 안 열리는데 바뀌었는지 물어왔다

엊그제, 같은 숫자를 오래 써선지 작동이 잘 안 되던 터에 혹시나 해서 번호를 바꿔 보았다. 반복해서 눌렀던 것에 그도 지쳤던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작동이 잘 되었다. 번호를 말한 뒤 놓고 가라며 간단히 끊고 가던 길을 계속 밟는데 1600 고지 언저리에서 또 벨 소리가 들렸다. 이곳 오르막의 끝은 있기나 한 건지 오르는 동안 숨은 턱을 치고 다리는 무겁지, 등줄기로 땀까지 줄줄거려 다음 쉬는 곳에 가서 전화를 해야겠다 싶어 안 받았다

한참 후 휴게소에 도착하여 숨 돌리고 점심까지 먹고 난 뒤, 배 넉넉해서야 전화에 생각이 미쳤다. ‘알려 준 비번으로 몇 번 시도했으나 문이 안 열려 그냥 돌아간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까 전화를 안 받아 메시지를 낸 모양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은 하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집에 와 막내랑 통화를 하는데 먼저 알려 준 번호는 다른 번호를 일러주더란다

이런! 현관 비번을 다른 비번과 착각해 헛나갔나 보다. 매일 쓰는 사람이야 현관 앞에만 서면 굳이 번호를 외우지 않아도 손가락이 숫자판 위에서 절로 반응하지 않던가. 다녀간 걸음이 헛걸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순간 미안해졌다.

기억력은 점점 시들해지는데 기억해야 될 것들은 자꾸 늘어만 간다. 가족 간의 특별한 날들이며, 인터넷 상거래 시에 필요한 비번들도 그렇다. 자주 찾는 웹사이트 접속에 필요한 비번에서부터 통장 비번까지 다양한 곳에서 각각의 비밀번호를 요구하고 있는 터다. 이것들은 모두가 기억력을 담보로 하고 있다

더러 안전을 위해 정기적으로 비번을 바꿔주라고 권하는 곳들도 늘고 있다. 이곳저곳 오랜만에 접속하려면 헷갈려 재차 확인하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정리해야지 해도 아예 안 쓸 생각이라면 모를까 딱히 정리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 요 며칠 전, 한참을 이용 않던 항공사에서 메일이 와 그저 그런 광고성 메일인 줄 알고 삭제할까 하다 일없이 열어 보았다. 누적된 포인트를 쇼핑몰과 연계하여 소멸되기 전에 사용할 수 있게 안내하고 있었다. 오호~ 하는 마음에 해당 항공사 대문 앞까지 갔는데 문을 못 열어 한동안 헤맨 끝에 새로 비밀번호를 부여받고서야 접속할 수 있었다

생각지 않던 모바일 쿠폰을 다운받아 여기저기 인심 쓰느라 잠시 즐거움으로 달떴다. 오래전 읽다 둔 책갈피에서 생각지 않던 지폐를 보는듯한 반가움에 크게 횡재한 느낌이었다. 기억력 저하로 얻은 것이라 인정하기는 싫고, 잠시 비번 잃어버려 얻은 소확행이라고나 해 둘까

천일야화에 나오는 알리바바와 사십 인의 도적 이야기 중 열려라 참깨라 해야 할 것을 잊고 쌀, 보리, 하던 생각이 나 피식 웃었다. IT 강국이라는데 내가 마음으로 열려고 들면 언제든 열 수 있는 만능 번호 하나쯤 부여해 줄 그런 곳은 어디 없을까. 기억의 한계를 더 느끼기 전에 그런 질 좋은 서비스 제공을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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