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충과 효 중시한 선비…자식에게도 인품 물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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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정권, 서귀포시 출신…일본서 노동조합 민족 해방 운동 참여
 송종현, 가파도 신유의숙 교직 생활…사회주의 항일 활동 헌신
 송지옥, 18척 선단으로 동생과 해산물상 운영해 부호로 성장
 송창빈, 탐라연구회 고문…‘표해록’ 일본어로 번역해 보급시켜
 송태옥, 오사카서 독립 운동…제국주의 전복 도모하다가 옥고
 송태현, 애월읍 금성리 출신…한림공원 설립 송봉규 회장 부친
충효를 중시했던 송태현은 이를 아들 송봉규에게 늘 가르쳤다. 송봉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향 땅에 명승지 한림공원을 조성했다. 사진은 한림공원을 찾은 관광객의 모습. 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충효를 중시했던 송태현은 이를 아들 송봉규에게 늘 가르쳤다. 송봉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향 땅에 명승지 한림공원을 조성했다. 사진은 한림공원을 찾은 관광객의 모습. 고봉수 기자 chkbs9898@jejunews.com

▲송정권宋正權:1910(융희4)~?, 일본에서 전협(全協) 항일 활동, 서귀포시 태생.

1926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했다. 1933년 9월 ‘전협 일본화학 신호(神戶) 서부지구 준비위원회 청년부 서기구’의 책임자였다. 1936년 11월 공청(共靑)에 가맹, 고무공장 직공으로 노동일에 종사했다.

고베(神戶)시 임전구(林田區) 구림정(駒林町)에 살면서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 일본화학 고베 서부지구’의 재건책 김태권(金太權·우도)과 어울린다. 

동 재건위원회의 청년부 및 서기국 책임자로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 1933년 11월 26일 공청(共靑)에 가맹하던 중 이듬해 2월 9일 검거돼 4월에 고베(神戶)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송종현宋鍾炫:1901(광무5)~1948(미 군정기), 제주의 신인회·신간회·조선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은 여산.

송해옥(宋海玉·1897~1935)의 장남으로 산북 신촌리(숙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향의 고희훈(高熙勛)의 딸 고복진(高福珍)과 결혼했다. 서울의 사립 휘문고보를 졸업, 어물상·주류 도매업에 종사했다. 

그는 사립 명신학교의 교사로, 그리고 한때 항일 운동의 메카라 할 수 있는 가파도의 신유의숙(辛酉義塾) 교사로도 있었다. 

송종현은 1921년 비밀결사로 제주 최초의 항일 청소년 단체 반역자구락부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1923년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제주에까지 퍼지고 장용견(張容堅), 양상룡(梁翔龍) 등이 민립대학 기성회 제주도지부를 운영할 때 서기로 임명돼 실무를 맡았다. 

1925년 반역자구락부의 멤버 중 사회주의적인 좌파들이 사상단체 신인회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산북1도리 송종현 댁에서 동년 3월 11일 창립됐다. 신인회의 선언 강령은 “무산자를 본위로 한 신사회의 건설을 기함”이었다.

결국 신인회의 선언 강령이 문제가 돼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강령을 초안한 송종현, 김택수는 동년 5월 9일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6개월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 제주 사람으로서 최초의 당원이 돼서 1920년대 제주 야체이카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추정하건데 1926년 아니면 1927년 초 공산당에 입당한 듯하다. 광주의 김재명(金在明)에 의해 강석봉(광주)이 입당하고 또 강석봉의 권유로 입당했는데 당시 강석봉은 조선공산당 전라남도 집행위원회의 책임 비서였다. 

그는 광복 후 경기도에서 생활하던 중 1948년 행방이 묘연해졌다. 

▲송지옥宋之玉:1845(헌종11)~1888(고종25), 해산물 매매업자.

제주성안 ‘칠성-골’에서 송신(宋藎)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우 송두옥(宋斗玉)과 함께 해산물상(海産物商)을 운영, 18척의 선단(船團)으로 어물을 교역해 최고 부호가 됐다. 

처음 이름은 기준(琪準), 자는 자균(子均), 호는 스스로 위죽당(爲竹堂)이라고 하고 1886년(고종23) 무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선전관에 추천돼 현직(顯職)으로 나갈 길인데도 출사하지 못하고 그만 1888년 타계했다. 

▲송창빈宋昌彬:1921(일제강점기)~, 고베(神戶) 조선고급학교 교사, 조선신보사 기자, 거류민단 동경 판교지부 소속 회원, 도쿄(東京)에서 제주향토를 탐구하는 탐라(耽羅)연구회 고문, 본관 여산, 지신(知申)공파. 

일본 교토(京都)에서 중학교를 졸업,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에 다니다가 해방 후에 중퇴했다. 

쥬오(中央)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48년 1월 애월리 출신 교포들이 재일관동(在日關東) 애월(涯月)친목회를 조직했는데 이조직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애월 출신 대정현감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한문 문적인 표해록(漂海錄)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인과 재일교포에게 보급시켰다. 일본 도쿄 자택에서 부인 정이순과 2남 2녀를 두고 병몰(病沒)했다. 

▲송태옥宋太玉①:1908(융희2)~?, 독립운동가. 일본 오사카에서 항일 활동. 본관은 여산.

제주시 삼도리 ‘향청-골’에서 송영(宋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동정천구(東淀川區)에서 1929년 이정죽(李貞竹)과 결혼했다. 

송태옥은 항상 일본 제국주의를 사회주의 사회로 전복하고자 했다. 

1938년 9월 검거돼 1941년 4월 15일 오사카공소원(控訴院)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동년 10월 3일 형이 종료, 출옥하자 곧 일본 사회주의 사상의 거물 춘일장태랑(春日庄太郞) 등에게 문건을 보내면서 투쟁했다. 1941년 10월 27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예방구금이란 조치를 내려 그를 투옥시켰다.

이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사상범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조치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송태현宋泰顯:1897(광무1)~1974, 마을 향장(鄕長), 본관 여산, 호는 금천(錦泉), 정가(正嘉)공파, 한림공원을 설립한 송봉규 회장의 부친.

애월읍 금성리 ‘모실-개’에서 송운송(宋雲松)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미래 개척의 땅 한림 ‘한수풀’로 이거(移居)했다. 길몽(吉夢)을 보고 외아들을 낳았다. 

그는 금성리 ‘모실-개’에 살 때에 충(忠)과 효(孝)를 중시해 1928년 충효비(忠孝碑)를 잘 보존하는 데 열성을 다했다. 

1941년 일본으로 갔다가 귀향한 그는 ‘한-수풀’ 서쪽 재암천(財巖泉)을 보고, 충(忠)과 효(孝)를 외아들 봉규(奉奎)에게 늘 가르쳤다.

후일 그 외아들은 해방 공간의 학생 운동으로 건국(建國)세력에 가담하고 최연소 제주도의원에 당선, 아들은 늘 어버이를 잘 모셨다. 

금천(錦泉)과 부인 홍씨는 외아들 꿈이 대성하기를 빌었다. 

후일 꿈대로 이를 실현했으니 이가 곧 한림공원(翰林公園)이라는 명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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