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위에서
바퀴 위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송창윤  수필가

퇴역한 탈 것들이 정원 모퉁이에 서로 기대어 서 있다.

한때 손녀 손자들과 동고동락하던 애물들이다. 유모차는 열여섯 해 전 할머니가 첫 손녀에게 선물한 것이다.

손녀를 태워 공원과 놀이터, 마트 등을 나들이하면서 얼마나 큰 행복을 안겨주었는지. 하지만 세월의 비바람 탓일까. 유모차는 덮개가 너덜너덜 찢겨 있고 세발자전거는 바퀴가 빠져 있는가 하면 네발자전거는 바큇살이 녹 쓸어 몸체를 지탱하기도 버거워한다.

마치 병원에서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 같다. 새집을 짓고 이사할 때도 애완동물처럼 따라 왔다. 며느리가 왜 버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아내는 손녀 손자들의 과거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하곤 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동하는 법을 익혀간다. 아기 때는 배밀이 하다 기어 다니고 네 바퀴 유모차를 타고 나들이한다. 유아 때는 아장아장 걸음마 하다 어기적어기적 걷고, 젖 먹은 힘으로 세발자전거 페달을 돌린다. 어린이가 되면 보조 바퀴 달린 네발자전거를 타다가 보조를 떼고 두 다리 힘으로 두 바퀴를 굴린다.

손자가 다리를 절며 자전거를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마치 50년대 나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듯. 당시는 자전거를 보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경찰관이나 우체부가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우체국 관사에 살던 때여서 빨간 자전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마음조이며 창고에 들어가 몸집보다 큰 자전거를 꺼낸다. 운동장에 끌고 가면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가슴 설레며 두 바퀴와 씨름을 시작한다. 아이들이 짐받이를 잡고 밀어주지만 발이 페달에 닿지 않아 뒤뚱거리다 넘어지는 것이 다반사다. 다리와 무릎에 아린 상처를 입어도 내색하지 못한다. 자전거도 손잡이가 틀어지고 페달과 크랭크 암 등이 찰상을 입는다. 이런 날에는 우체부 아저씨에게 들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손녀 손자들에게 현장교육을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으려면 두 발로 페달을 힘껏 밟아라. 넘어지려고 할 때는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라. 내리막길에서는 페달을 잠시 멈추고 자전거 속도에 몸을 맡겨라. 건널목 신호를 꼭 지켜라 등등. 그리고 넘어짐이 있어야 배울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어느덧 유모차를 타던 아이들이 두발자전거 위에 몸을 싣고 치르릉 치르릉 넓은 세상을 향해 달려간다. 두 바퀴 위 인생의 시작이다. 또래들과 함께 페달을 밟으며 달려 나아가는 성취감이 얼마나 클까. 부쩍 자란 손녀, 손자들과 이들의 한 몸이던 탈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사계를 생각하게 한다.

인생은 첫 들숨을 쉬며 세상에 태어난다. 아기는 커가며 네 바퀴의 보행기와 유모차, 세 바퀴 자전거를 타고 바동대는 봄을 맞고 자기 힘으로 두 바퀴 페달을 밟으며 쌩쌩 달리는 여름을 맞는다. 의욕과 정열과 희열의 계절, 인생의 절정기다.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산과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걷던 무릎에 삐걱거림이 잦아지며 지팡이에 의지하는 쇠락의 계절이 온다. 게다가 서둘러 냉혹한 겨울을 불러드리는 것이 아닌가. 희어지는 머리와 구부정해지는 허리에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고,이빨은 쉬 부러지고 깨진다. 기운이 쇠진하여 몸은 흔들리는 울타리 같고 때론 119구급차에 몸을 맡긴다. 결국엔 생각과 말도 빠져나가고 아기처럼 기어 다니다 마지막 날숨을 쉰다. 유모차를 타던 아기가 바퀴 위에서 열락과 쇠락을 만나며, 지팡이에 의지하다 휠체어마저 탈 수 없는 때가 오면 장의차에 육체를 실어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모퉁이에 서 있는 유모차가 애잔해 보여 시트에 들국화 화분을 올려놓았다. 꽃수레처럼 곱고 향기롭다. 하지만 녹 쓸고 헐거워진 몸체가 분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듯, 화분을 내려놓자 고마워한다. 산다는 것은 늙어감이요, 내려놓음이요, 그리고 돌아감이라며.

인생의 겨울을 살아간다. 봄 여름 가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마음의 거울에 들여다보니 참회할 일들뿐.

오늘도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또 한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두 바퀴 위에 몸뚱이를 싣고 본향 길을 걷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