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
단순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늦가을 하늬가 기세를 올리면 어머니는 바람을 등지고 키질을 했다. 타작 뒤, 마당을 휩쓰는 바람에 지푸라기가 날려 난분분했다.

둥그런 멍석을 펴고 옆에는 도리깨질로 타작한 콩을 잔뜩 쌓아놓았다. 가을 해는 턱없이 짧다, 땅거미가 내리려 마당 구석으로 팽나무 그림자가 얼씬거린다. 어머니 손놀림이 빨라지며 속도를 낸다. 바가지 가득 키에 올려놓고 치대면 바람이 콩 껍질을 날렸다. 여러 번 하면 키에 콩알만 남는다.

키질은 콩 껍질을 분리하기 위해 바람을 이용한 선별 작업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키질하는 어머니 두 팔이 밑으로 처지지만 곁엔 콩알이 수북이 쌓인다. 요즘엔 밭에서 경운기 바퀴로 타작하고 그 자리에서 선풍기를 틀어 키질을 대신한다. 힘이 덜 드는데 일의 진행은 빨라졌다. 경험칙에 의한 진화다.

키질은 잡된 껍질을 분리해 간결·간소하게 한다. 단순화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키질에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포갠다. 사소한 일들이 얽히고설킨 일상이 키질하던 콩 더미로 보인다. 키질로 콩 더미는 단순화되고 나중엔 메주나 두부로 혹은 콩국으로 태어난다. 키질이 변용된 가치다. 잡동사니 속에서 복잡하게 살지 말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행복한 인생을 사는 비결은 단순화다.

정원의 나무를 전지한다. 가지를 쳐주면 수형이 단아해진다. 단순화를 위한 노고를 나도 경험했다.

우리는 잡다한 일들에 휩싸인다. 훌훌 털어내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 결국 그것들에 속박받는다. 그런 일들을 정리해 단순화하지 못한 채 과거에 멈춰 있기 때문이다. 주객전도다.

미련도 몫을 할 것이다. 미련은 집착을 낳으면서 마음속에 진을 치고 들앉는다. 과거를 정리하지 못한 사람에게 현재를 챙길 정신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현재를 누릴 때 삶은 꼿꼿이 뼈대를 세우며 일어난다. 현재라는 시간을 끌어안지 못하면 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하고 고단하다. 기운이 쇠해진 삶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과거에 밀려난 현재엔 변화와 발전이 없다. 꺾인 날개론 날 수 없는 이치다.

방법은 한가지. 아직 과거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등 떠밀어 현재로 돌아오게 이끌어야 한다. 한마디로 현재를 최우선으로 한 삶이 현명한 삶이다. 하지만 이런 시공간의 이동이 생각 같겠는가. 죽치고 앉았던 오랜 자리에서 자신을 무 뽑듯 뽑고 나오는 일은 지난하다. 그렇게 고질화된 것과 결별하려면 단호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득(自得)의 눈을 떠야 한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인간은 평생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산다.’고 한다. 걱정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을 사건의 개연성에서 나오거나 이미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별로 신경 쓸 필요 없는 일, 바꿀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에 관한 것도 섞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정신적·신체적·사회적 건강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를 지적해 법정 스님은 “오지 않은 미래를 가불해 와서 미리 걱정하지 말자.” 했다. 걱정에 덜미 잡혀 지금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현재를 살지 못하니 인생의 참맛을 알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걱정에서 떠나야 한다.

어머니는 콩을 거둬들여 키질로 단순화하면서 추수라는 현재의 보람을 만끽했을 것이다. 차가운 하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재 속에서 가족을 먹어살려야 했으니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