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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뜰을 서성이는 시간이 내겐 여유로운 즐거움이다. 송죽엽 수국 접시꽃이 눈길 보채고 앵두로 포식한 새들의 노래가 허공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냥 햇볕을 벗하노라면 습한 마음도 금세 말라버린다.

흰색과 회색으로 삽화를 잔뜩 그려놓은 청잣빛 하늘은 상상을 꼬드긴다. 머리 위로 곧장 무한히 뻗어나가면 끝이 있을까, 없을까 실없이 생각하다가 땅바닥을 바라본다. 맘 놓고 두 발 디디라고 대지가 가슴으로 받쳐주는 듯하다. 서로 관계없는 게 무엇일까. 삼라만상은 서로서로 기대어 존재하는 것을.

군중 속에 있어도 사람은 외로운 섬이라고 하지만, 나는 혼자 있어도 사람들 손을 맞잡는다. 슬픈 인연도 아름답게 해석하는 나이에 이른 탓인가. 얼마 전 증명서 떼려고 주민센터에 들렀을 때다. 지문인식을 하려고 엄지를 밀착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지문이 많이 닳아버린 것이다. 손가락에 밴 땀의 노고를 되짚다가 세파를 건너온 탓이려니 하고 마음을 달랜다.

세월을 털어내며 걷노라고 했는데, 얼굴에도 흔적이 첩첩이 쌓인 모양이다. 일전에 지인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러 아내와 동행할 때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낯선 아저씨가 백신을 접종했느냐고 불쑥 물었다. 아직 못했다고 하니 “나이가 지긋한 분들 같은디 어떵해연 안 맞읍디가?” 하고 채근하는 목소리였다. 아내는 아직 순서가 안 돼서 그렇다고 응대했다.

너나없이 큰 문제는 코로나를 벗어나는 일일 테다. 마스크 쓰기야 일상화됐지만 요즘 이곳에서 전해지는 확진자 수는 줄어들 줄 모른다. 집단 면역이 관건인 모양이다. 나는 며칠 전 근처 병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했다. 고혈압 당뇨 등 질환을 벗하는 터라, 풍문에 실려 오는 부작용이 두려웠다. 모든 건 운명 아닌가. 사람 수만큼 반응도 제각각일 테다. 고열과 통증을 대비하여 10알이 든 타이레놀 2통을 준비해 두었지만 개봉하지 않은 채 지나고 있으니 다행이다.

접종 첫날엔 나른하고 미열이 생기는 듯했지만, 심하진 않았다. 이틀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뒤통수뼈가 뻐근하여 목덜미를 수시로 문질렀다. 이런 현상이 며칠 이어졌지만,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아내는 최소 10일은 기다려봐야 한다고 염려하지만 괜찮을 것 같다. 골골거리며 살아온 터라 의료진의 노고가 늘 고마울 뿐이다.

어쩌다 살맛 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마음이 환해진다. 엊그제 봄벌초를 준비하려 예초기를 점검해야 했다. 지난가을 멀리 떨어진 단골 수리점을 찾아 손을 봤는데도 기름이 줄줄 샌다. 하기야 30년도 더 되었으니 탈이 안 날 수 있으랴. 그간 부품과 날을 몇 번 교체하며 사용해 왔다. 굼뜨게 일을 한데도 예초기가 낫질에 비교될 순 없어서다.

이제 영영 이별일까. 가까운 제주시농협 동부영농지원센터를 찾아갔다. 농기계 수리하는 곳엔 건장한 젊은이 네 명이 있었다. 늙수그레한 모습이 자동차에서 예초기를 꺼내자 안쓰러웠을까 그들은 무척 친절히 맞는다. 자리를 마련하고 차를 권하기도 한다. 아는 사람을 대하듯 밝은 언행이 몸에 뱄다. 둘이서 문제의 부품을 능숙하게 손을 보곤 시동을 거니 부드러운 숨소리를 낸다. 직업을 사랑해서일까, 친절도나 전문성 모두 만점이었다. 세상은 이래서 여전히 밝은가 보다.

공존을 위한 만상의 숨결로 시간이 곱게 채색되며 유유히 흘러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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