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소비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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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냉장고 한 편에 있는 우유 팩이 눈에 띈다. 마시기 전 습관적으로 확인한 유통기한이 오늘까지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이걸 어떻게 하면 빨리 먹을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트나 시장에서 주부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것이 있다면 식품의 신선도와 유통기한을 꼼꼼히 살피는 일이다. 식료품에는 법적 유통기한이 표기되어 있어 될 수 있으면 섭취 가능한 날짜가 오래 남은 것을 고르려고 노력한다. 그중 가장 신경 쓰이는 품목이 있다면 바로 냉장 식품이다.

언젠가 유통기한이 지난 유제품을 먹은 적이 있다. 혹시나 해서 냄새도 맡아보고 컵에 부어 상태를 확인해 봤어도 별문제가 없었다. 가족들은 기한이 지난 식품을 먹은 것에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라며 다음부터 조심하라 당부까지 한다. 별문제가 없을 거라 확신했지만 먹으면서도 찝찝하다는 느낌이 든 건 사실이다.

유통기한은 제품의 제조일로부터 소비자에게 판매가 허용되는 기간을 말한다. 가족들이 나를 걱정했던 이유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나, 식품의 포장지에 표기된 날짜를 확인하고 행동했던 민감한 반응들이다.

경계를 그어 놓고 경계 밖으로 나가면 위험해진다는 인식을 주는 유통기한이라는 개념, 우리가 만들어 놓은 금줄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꼴이 되는 건 아닌지.

판매기한이 지났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음식물이 폐기된다고 한다. 그로 인한 환경문제 또한 심각하다. 우리나라 생활폐기물 중 약 26%가 음식물 쓰레기인데 이중 약 10% 정도가 단순히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라지 않은가. 사실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이 지났을 뿐, 그냥 먹어도 되는 것임에도 우리 스스로가 마음의 유통기한을 정해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슈퍼마켓에 가보면 팔다 남은 채소들을 묶어 파는 알뜰 코너가 있다. 가격은 20∼30% 저렴하면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운 좋으면 신선도가 꽤 높은 식품을 구매하기도 하는데, 만약 유통기한이 있었다면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됐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더 오래 먹을 수 있게 ‘소비기한’을 표시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소비기한은 식품을 개봉하지 않은 상태에서 먹어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기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유의 유통기한이 10일이라면 소비기한은 50일까지 섭취 가능한 것이 된다. 경제적·환경적으로 이 얼마나 가치 있는 소비인가.

살아가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소비기한은 얼마나 될지 생각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라고 해서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좀 시끄럽다는 이유로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을 먹은 적은 없는지, 스스로 돌아보며 조용히 삭제하곤 한다. 나를 대하듯 상대를 대하려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코로나19로 오랫동안 힘겹게 지내고 있다. 이제 적극적으로 백신을 맞겠다며 줄을 서는 시민들을 보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이럴수록 서로 격려하는 ‘마음의 소비기한’을 늘려보는 건 어떨까. 좀 더 힘을 내고 조금 더 버틸 수 있도록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자. 멀지 않아 마스크를 벗고 환하게 웃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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