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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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자 수필가

대문 안쪽에 있는 빈 항아리들과 눈을 맞춘다.

한평생 어머님과 함께했던 시댁 대문에 들어서면 맨 먼저 반겼던 것들이다.

어머님의 손길이 묻은 사람 허리보다 높은 제주 항아리 대여섯 개와 작은 옹기들. 터를 옮겨 자리를 잡은 물건들이지만 왠지 옛 주인의 손길을 그리는 것만 같다.

어머니가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 달포쯤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하루 면회자 인원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임종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어머님께 달려갔다. ‘어머니’. 한 옥타브 올려서 불렀지만, 초점을 잃은 눈은 허공만 보며 반응이 없었다. 레테의 강을 건널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편안함인지, 무심함인지 어머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 집을 찾았을 때 반기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어머님 댁에 방문하면 어머님은 인사를 채 나누기도 전에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다.

다진 마늘, 다듬은 파, 자리돔 다진 것, 물미역, 취나물, 김치 등 갖은 찬거리를 다 꺼내 놓았다.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시는 것은 된장이었다. 아이들은 어리고 집에서 식사하는 일이 드물었으니, 된장이 그리 빨리 바닥이 나겠는가.

일하는 며느리가 밥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는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찬거리를 챙기고 나면 어서 가라. 너도 가서 쉬어야지재촉했다. 주말에 방문한 며느리에 대한 배려라는 걸 알기에 나 역시 선뜻 일어서질 못했다.

오직 자식들 얼굴을 보지 위해 기다렸을 어머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싶었다.

명절과 제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편한 일은 나에게 맡기고, 바깥 부엌에서 하는 일은 어머님 몫이었다.

음식 솜씨가 서툴러 어머님께 조언을 구하면 음식은 짜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말씀이 전부였다. 명절이 끝나면 친정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하던 일을 멈추게 하기도 했다.

결혼식 날 친정아버지가 사돈님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하며 어머님께 따로 드린 부탁을 마음에 두셨던 것인지 설익은 나를 따듯하게 품어 주셨다.

제사를 우리 집에서 모시게 되자, 새 제사용품을 마련할 경비까지 쥐여줬다. 냉동 가능한 식품은 미리 장만해 두었다가 제사 지낼 경비까지 함께 보냈다. 어머님 눈으로 보면 나는 늘 부족했을 텐데 늘 애썼다, 수고했다.” 말로 편안하게 대해 주셨다.

어머님은 큰 항아리에 된장을 담그셨다. 구수하게 익은 된장은 자식들뿐만 동네 분들과도 나눠 먹었다.

암 병중인 동네 며느리에게, 혼자 사는 어르신께, 옆집에 터를 잡은 이주민에게 베풀다 보면 된장 항아리는 금세 골막해졌다.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없어도 된장이 있으면 나쁠 일이 없다.” 하며 팔순을 훨씬 넘을 때까지 된장을 담으셨다.

항아리에서 된장을 발효시키듯 어머님은 뭐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거동이 불편해져 요양병원으로 모셨을 때도 잘 적응하셨다. 가족을 떠나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영정사진을 들고 어머님이 살았던 집안을 한 바퀴 돌았다. 집안 곳곳에 묻어있는 어머님의 체취가 스멀스멀 고개를 내미는 것 같았다.

함께 했던 시간이 겹쳐지면서 먹먹한 바람이 일었다. 고인이 이승의 삶에 미련을 갖지 말게 앞만 보라지만옮기는 걸음이 쉬 떼 지지 않았다.

한 줌의 재가 된 어머님을 가슴 가까이 당긴다. 언제 이렇게 어머님을 가까이 대한 적이 있었는가. 진심으로 안아드린 시간은 정녕 있었는지.

대문 안에 나란히 어깨동무한 항아리들. 볼 때마다 어머님의 시간이 소환되고 가슴이 서늘해진다.

당신의 넉넉한 품에 머물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다는 말을 이제라도 당신께 전하며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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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2021-06-13 12:11:34
가슴 먹먹하고 눈앞이 흐려져 몇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부모님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마음 따뜻한 글 정말 좋습니다.
지금부터 살아계신 부모님께 후회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