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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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이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말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부모님께서 유언처럼 당부하셨거든요.”

지난 2월 어느 날, 송씨 어르신은 70여 년을 가슴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으셨다. 이야기는 1948년으로 거슬러 간다.

애월읍 신엄리와 고내리 사이 하가리로 올라가는 곳에 당이 있었다 하여 그 일대를 자운당이라 부른다. 1948년 11월 28일, 자운당 옴탕한 밭에서 군인들이 수십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다. 송씨 어르신의 아버지도 그 속에 껴있었다. 토벌대들이 뒷집 남자의 행방을 물었는데 모르겠다고 했다는 게 잡혀간 이유였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잡혀간 무수한 사람들이 허망하게 우리 군인의 총탄에 스러져간 것이다. 시신 수습도 몇 달 지난 후에야 겨우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운당에 끌려간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학살당한 날 밤 송씨 어르신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집으로 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자 어르신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다 죽엇져!”

넋 나간 사람처럼 이 한마디를 뱉고는 허둥지둥 아버지는 마루짝을 뜯어내어 그 아래로 숨었다. 살아왔지만 살았다는 자체가 죄스럽고 두려웠다. 마루 아래에 숨어 살다 절에 가서 숨었다. 오래도록 죽은 사람으로 살았다.

줄 세워놓고 한 사람씩 총살을 했는데 바로 옆 사람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같이 쓰러지라는 말을 큰아버지의 사위가 귀띔해줬다고 한다. 계급이 높은 군인이었으나 빼내줄 수는 없다며 강구책을 내준 것이었다. 총에 맞아 피 흘리는 사람들 틈에서 죽은 척 엎드려 있다가 주변이 깜깜해지고 고요해지자 시신들을 비집고 나왔다. 집으로 와야 하는데 번듯한 길로 오지도 못하고 사람 눈을 피해 밭을 건너고 오름을 지나 가시에 긁히고 돌부리에 채이고 피를 좔좔 흘리며 집으로 온 것이다.

어르신의 아버지는 4·3의 광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건강도 안 좋아졌다. 큰아들 장가만 보내놓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 하셨는데 큰아들인 송씨 어르신은 물론 다른 자식들도 모두 결혼시키고 88세에 돌아가셨다 한다.

이 이야기는 자운당 학살의 숨겨진 이야기다. 어떤 이는 이 정도의 이야기는 숨기고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나온 이야기들은 간간이 있고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도 많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픔은 피해 당사자를 중심에 놓고 보아야 한다.

비극적이고 끔찍한 일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건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런 역사가 되풀이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쓴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이것은 일어난 일이고, 또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증언해야 하는 핵심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만 잊자’고, ‘그만하자’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은 없다. 공감과 연대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건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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