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렁더우렁 사는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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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초봄부터 베란다를 환하게 밝혔던 순백의 긴기아난 꽃이 진 후, 내겐 뜰 같은 베란다가 적막해 허전하다. 갈색으로 변하며 지던 꽃송이가 이울어가는 내 모습과 닮은 것 같아 연민이 들었다.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라고 화분 속에 도로 넣어주곤 했다. 꽃을 잉태하느라 산고를 겪었을 텐데, 영양제로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햇볕이 거실로 성큼 들어온 날, 연둣빛 새잎을 올리는 군자란 잎에 눈길이 머문다. 너나없이 정물이다. 몇 안 되는 모임도 멈춘 지 오래다. 나와 잇고 있는 인연의 끈이 아득하게 멀어진 것 같아 가슴이 휑하다. 함께 놀며 기쁨을 주었던 난 꽃이 진 후, 친구 생각이 더 간절하다. 전화로 하루 두어 번 수다 시간이 늘었다. 변방에서 덤덤하게 지내다간 잊힌 사람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슬며시 들던 날이다.

한 지붕 아래 살지만 마주하기 조심스럽던 이웃이 갓 데친 파란 톳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짭짤한 소금기에 상큼한 바다향이 밴 톳을 새콤달콤하게 무쳤다. 갑갑한 생활에 정이 그리웠던 탓일까. 물색 고운 봄 바다 속살 한 젓가락 입에 넣자 식욕이 확 당긴다. 짙푸른 바다가 식탁 위에서 남실댄다. 뜨내기처럼 서먹했던 제주 생활에 스스럼없는 이웃이 된 소중한 인연이다.

한곳에서 오래 살아 좋은 점이 많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낯익어 눈웃음으로 인사를 나누곤 한다. 서로 다른 갖가지 삶을 구태여 알려 하지 않는다. 그저 고만고만하게 사는 이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웬만한 사정없는 삶이 있으랴. 좋은 일에는 덕담 보태고, 궂은일에 따뜻한 말 한마디 얹어 주는 온기가 이웃으로 사는 정이고 힘이 아닌가.

오래 살던 곳을 뜬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뿌리를 내리는 변화가 두려웠다. 어린아이처럼 낯가림이 심해 이 동네를 감히 떠날 생각을 못 한다. 한때 웅덩이에 고인 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곳으로 흘러갈까 고민했지만, 변화보다 안정이 좋다는 고루한 생각에 접은 지 오래다.

산책 삼아 동네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마냥 친숙해 정겹다. 철마다 변하는 풍경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입력돼 있다. 4월이면 제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흰 라일락꽃이 피는 집 앞을 서성인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저녁을 설레게 하던 향기를 잊지 못한다. 아늑한 동네 신혼집이었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폈던 보라색 라일락꽃 위로, 달빛이 는개처럼 내리던 그 집이 그리워 발길이 절로 끌린다. 옆집에 송아지만 한 개가 컹컹 짖어대던 옛 동네와 많이도 닮았다.

초봄 텃밭 곁 가시덤불 숲에 소담스레 올라온 머위를 얻어, 강된장에 싸 먹는 별미는 깔깔한 입맛을 찾곤 한다. 여름 내내 붉은 벽돌담에 넝쿨을 치렁치렁 걸치고 능소화가 피는 집. 달착지근 향기 그윽한 옥잠화가 담 밑을 밝히는 집. 늦가을까지 오종종한 감이 붉은 등처럼 가지가 휘어지게 달린 집. 웬일인지 감을 따지 않아 종일 온갖 새들의 잔칫집 같던 철대문집을 탐하곤 한다.

지근거리에 이런 풍경은 나와 더불어 사는 소중한 이웃이요,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임의로운 동네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소소한 일상을 누리며 사는 것도 복이라 여긴다. 어디서 어떤 집에 사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떡보라고 소문나 제사떡을 현관문에 걸어놓고 가는 이웃이 있는, 오래 살아 좋은 동네에서 어우렁더우렁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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