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지 표지석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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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평화의 섬에 살고 있다.

과연 그런가?

유사(有史) 이래 언제 평화를 누려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리.

섬은 수난의 땅, 수난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외세의 침입, 탐관오리의 수탈과 학정, 이에 대한 민중의 항거, 게다가 자연의 재해는 오랜 역사 속에 중단 없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일본(왜구)의 제주 지역 침범과 약탈은 고려 시대 이후 계속되었고,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20여 차례에 이르고 있다고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

15555월 왜구는 전남 해남군 달량포로 침입해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습격했다. 출병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은 왜구에 포위돼 전사했다. 그러나 전주부윤 이윤경의 구원병에 의해 왜구는 물러났지만, 본거지로 돌아가지 않고 제주도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1555627일 왜변이 일어났다. 70여 척의 배에 나눠 탄 왜구 천여 명은 제주의 관문이었던 화복포로 침입했다.

화북수전소를 점령한 왜적들은 제주성 남수각 동쪽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3일간 포위하고 나섰다. 이에 김수문 목사와 이선원 판관이 지휘하는 관군은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했던가. 절망적으로 어려울 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갑사(甲士) 김성조·이희준, 정로위(定虜衛) 김직손, 보인(保人) 문시봉 등이 치마(馳馬)돌격대와 함께 용맹스러운 군인 70여 명이 적진으로 돌격해 왜구에게 타격을 가했다.

붉은 깃털을 단 투구를 쓴 적장을 활로 쏘아 넘어뜨리자 왜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김수문 목사는 군관 장려에게 명령한다. 바다로 쫓겨 가는 왜선을 대포로 공격을 시작하자 왜구들은 물에 빠져 죽고 살아있던 54명은 목을 베 수급을 얻었다 또한 적선 6척을 포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역사의 가설이 끔찍하지만, 만약에 을묘왜변 당시에 제주성이 왜구에 의해 함락되었다면, 제주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순국의 정신으로 대적을 격퇴시킨 대전승을 거두고 민생의 안전을 구한 것이다.

현재의 남수각 고릉은 존망지추의 향토를 수호하고 왜변을 극복한 민병(民兵)의 발상지요. 김성조 건공장군의 투혼이 살아 숨 쉬는 충의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남수각에 놓여 있는 다리는 동서로 그 길이가 50m가 된다. 그런데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전투 격전지인 전적지표지석이 다리 동쪽 끝에 잘 보이지 않은 곳에 외롭고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후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이는 공로를 기리는 마음이 역부족이라 할 수 있겠다. 이참에 한 마디 더 붙인다면, 제주의 역사를 빛낸 인물들을 초등교육 교과과정에 넣어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선현들의 숭고한 얼을 배우고 익히는 온고지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성역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하는 6월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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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호 2021-06-21 19:32:12
훌륭한 글, 잘보았읍니다.
남양 mbc 근무하신 김익수 피디님이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