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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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필가

영덕 강구항으로 가던 길, 해안가에 우뚝 선 커다란 군함 한 척을 보고 차를 돌렸다. 군함은 65년 만에 귀환한 문산함’,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다.

2000t문산함이 처음 장사리에 온 것은 한창 북한군에 밀리던 1950915일이었다. 군함에는 2주간의 단기훈련을 마친 772명의 학도병이 타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대비한 성동격서’, 즉 동쪽을 쳐들어가는 듯 상대를 교란해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전술 성공이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공격으로 군함은 좌초됐고 772명의 학도병 중 139명이 전사했으며 39명이 포로가 됐다. 그러면서도 4일 넘게 버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 동부의 북한군 전력 약화에 큰 공을 세웠다.

군함에는 문산’ ‘작전명 174잊혀진 영웅들’ ‘, 학도병들이여등의 문구가 비스듬한 글씨체로 쓰여 있다. 동해의 거친 파도는 그날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군함에 부딪힌 후 모래사장으로 밀려와 하얗게 스러진다.

기념관 곳곳에 걸린 사진 속 학도병의 앳된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디서 보았더라. 커다란 군복을 입고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들. 그 표정은 사진 속 내 아버지의 열여섯 소년과 다를 바 없다.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군복을 입고 찍은 소년의 사진을 아버지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고 많은 사진 중 왜 그걸 마음에 두었는지. 아마도 앳된 소년의 표정에서 강건했던 아버지의 이면에 숨겨진 본연의 모습을 짐작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군대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남겨놓은 사진을 보며 소년으로 입대해 청년으로 제대를 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걸 안 것도 참전용사의 집이라는 팻말이 문설주에 붙던 어느 해였다. 아버지는 그때 회한이 서린 얼굴로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하셨다. 그날 아버지로부터 작은할아버지께서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다 전사하셨고, 가까이 사시는 친척 할아버지는 팔에 총상을 입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매해 현충일에 혼자 국립묘지를 찾아가는 건 전쟁 동지인 작은할아버지께서 그곳에 계셔서였다.

영덕 어딘가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는 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학도병들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도 그런 연유다. 막 사춘기에 접어들 소년들,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부름에 응해야 했던 저들은 그 당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무심한 그들의 표정 너머를 나는 읽을 수가 없다.

문득 아버지에게도 그들에게도 청춘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책과 펜 대신에 총칼을 들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한목숨을 바친 것도 그들의 뜨거운 청춘이라 했지만 과연 그러할까. 어쩌면 그들에게 청춘은 상실의 시절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십 대를 넘기고, 마지막 휴가에 결혼해 가장으로 힘겹게 살았다. 술을 한잔 걸치고 기분이 불콰해지면 내 인생에 청춘은 60대였다는 말씀을 하신 건 칠십 무렵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세계여행을 꿈꾸시더니 그걸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

학도병들을 보며 처음으로 아버지의 소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여쭤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오롯이 국가에 헌납해버린 시절에 무슨 오색 꿈이 있었을까만. 그때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미련이었다. 무거운 걸음을 재촉해 갑판에 올랐다.

시퍼런 바다가 하얗게 갈기를 날리며 거칠게 달려와 뱃전에 부딪힌다.

그날 그 바다도 이랬을까. 바다에서 필사적으로 배를 향해 헤엄치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여, 그때의 소년들과 내 아버지의 소년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다.

6·25 참전 학도병들이여! 그대들의 청춘은 영원히 살아있으며 그 누구의 것보다 뜨겁고 멋지시나니. 부디 편안히 영면하시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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