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쉼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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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주 수필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라봉과 별도봉을 오르는 일은 언제라도 좋다. 연초록이 진초록으로 깊어가며 꽃잎이 더욱 선명해지는 요즘은 발걸음마저 가볍다.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인지 목덜미를 스치자 영혼까지 깨어 팔딱거린다.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은 내가 사라지고 네가 들어오는 순간이다. 새를 보고 있으면 새가 되고,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된다. 꽃을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나뭇잎을 보면 푸른 피가 도는 것 같다.

암 환자가 산속의 요양원을 찾는 이유는 자연과 교감하며 건강한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다. 신선한 공기와 맑은 물소리가 마음을 정화시키면서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일요일이다. 길가에는 송엽국, 팬지, 삼색제비꽃, 민들레꽃들이 옹기종기 피어 수다를 떤다. 나뭇잎이 바람에 나풀거리듯, 산책 나온 강아지의 털들도 걸을 때마다 나풀거린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라봉 입구 주차장으로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과일 장수, 칡 장수, 야쿠르트 아줌마, 튀밥 장수, 그 옆으로 미나리 파는 할머니까지…. 그중에 각별히 관심이 갔던 분이 있다면 미나리 할머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나로서는 할머니들을 볼 때면 은연중 친근함이 느껴진다. 이 세상 모든 딸들의 어머니 같아 보이기도 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이 까무잡잡한 할머니 옆으로 다가앉자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미나리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이것 좀 봐요!” “아침 일찍 밭에 나가 캐 온 것이라 아주 부드러워요.”

“돌미나리랑께.”

잘 다듬어 놓은 미나리 한 무더기를 보니 우리 가족에게는 충분하겠다. 사려는 표정을 어떻게 읽었는지 잽싸게 미나리를 담아 손에 쥐여준다. 주머니 속의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더니 손에 침을 발라가며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만 원을 센다. “하루에 돈을 얼마나 버시나요?” “십만 원은 벌어야지!” “시장으로 가면 더 나아.”

올해 연세가 90으로 장사한 지는 30여 년이란다. 돈이 있어도 딱히 쓸 곳이 없지만, 손주들 용돈 주는 즐거움으로 매일 나가게 된다는 할머니.

“막걸리 한잔할래요?”

뜻하잖은 할머니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자 커다란 종이컵에 막걸리를 콸콸 붓는다. 가방 속에서 빵을 꺼내더니 굽은 손으로 뚝 떼어 주기도 한다. 손톱 밑의 거무스름한 때가 보여 잠시 주춤거렸지만 모르는 척 받았다.

신라 원효대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가 어느 무덤가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다음날 해골에 괸 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구역질을 하다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음을 깨닫고 가던 길로 다시 돌아와 마음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 눈, 귀, 코, 혀, 몸은 그 대상을 만나면서 마음으로 느끼고 구분하게 된다. 모든 행동은 마음을 통해 일어나므로 마음을 우선으로 여겼다. 행복과 불행이 한 끗 차이라는 말, 그 한 끗은 지혜로운 마음을 사이에 두고 한 말이겠다.

초면에 흔쾌히 막걸리를 권하던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 삶이 각박하다지만 이런 따뜻함이 있으니 세상은 아직 살 만하잖은가. 가져온 미나리를 부엌에 펼치자 집안으로 향이 가득하다. 그 위로 삶의 쉼표 같은 할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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