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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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교통사고 현장을 보며 하는 말이다. 현장의 상황을 근거로 누구의 잘못인지, 일방적인지 쌍방인지 가려지는 게 교통사고인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니 말도 안되는 얘기다.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목소리로 겁박하고 보자는 힘의 논리다. 이런 억지가 없다. 밝은 세상이라 목소리 크기로 유·불리가 결정되는 건 옛날얘기일 것이다.

서부유럽을 여행할 때, 그곳 문화에 해박한 가이드에게서 영국의 날씨를 설명하며 사람들이 기후를 닮아 간다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가 하는데 문득 해가 나 후텁지근한가 하면 이내 찬 바람이 불어 썰렁해진다. 도무지 예측 불가한 날씨다.

하지만 강풍에 큰비는 드물어 대체로 우산 없이 맞고 다녀도 될 정도로 오다 말다 한다. 더워도 잠시 그늘에 들어 땀을 들이면 된다.

날씨는 천연환경이다. 그런 날씨 속에 살다 보면 사람도 어느새 날씨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라 사람들의 특성으로 배게 된다. 영국인들은 변화가 심한 불규칙한 날씨를 닮아 ‘변덕스러울’ 것이라 하는 타국인의 말에, 그들은 웃으며 받아넘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극단적이지는 않아.”라고.

장마철에 연일 내리는 비, 가로수며 전신주를 쓰러뜨리는 태풍, 논밭이 쩍쩍 갈라지는 심한 가물을 떠올리며 한국인을 향해 한 말일 테다. 내리다 말다 하는 부슬비가 영국의 비날씨라면 도당집 지붕에 구멍이 날 것 같은 거칠고 험악한 작달비의 한국 날씨. ‘변덕’과 ‘극단’의 상징이니 두 민족의 특성을 그렇게 빗댈 만하다.

더욱이 육지 사람들은 우리 제주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싸우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보면 평상시가 그렇다니 깜짝 놀란다. 바람 센 날 바닷가에서 여인들이 주고받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자지러질지도 모른다.

겨울날 북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오는 듬북(밑거름 용 해조류)을 건져 올리며 주고받는 얘기는 그야말로 고함을 내지르는 수준이다. “그만저만 해영 가게. 얼언 더 해지크냐. 불턱에 강 불이라도 쬐엉 오거나 호게.(그만저만 하고 가게. 추워서 더 할 수 있겠나. 불턱에 가 불이라도 쬐어 오거나 하자.)” 함께 온 동네 이웃에게 건네는 말이다. 이 일의 현장을 떠올리면, 겨울날 폭풍 휘몰아치는 바닷가에서 해조류를 건지는 여인들의 악전고투하는 모습이 눈물겹다.

여다(女多)의 섬답게 제주 사람들, 특히 제주 여인들의 목소리는 턱없이 크다. 밭에서 바다에서 일하며 큰소리를 내던 것이 나중엔 습관적으로 고질이 돼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상생활 속에서도 오가는 말이 거칠어 좋은 감정을 건드리는 일도 허다하다. 선량하게 태어났으면서 바람과 싸우며 커진 목소리가 정서까지 투박하게 했다면 이런 억울함이 없다. 서울 한복판에서도 목소리를 들으며 표가 날 정도다. 제주 토박이로서 가슴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기후 환경을 닮아 목소리는 크더라도 한순간에 욱하고 끓어오르는 감정만은 자제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와락 치밀어 올랐다가 금세 식어 버리는 도발적인 성깔. 목소리 큰 제주 사람들, 좋은 쪽은 최대한 살리고 나쁜 쪽은 조금씩 줄여 가는 노력이 필요할 것만 같아서 조심스레 한 말씀 올린다. 바람 탓에 제발 목소리가 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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