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왕에게도 직언 마다하지 않아…지조 높은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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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치현, 일본 탄광서 일하며 친일 배척·야학 운영 등 독립 운동
 양경천, 조정에 상소문 올렸다 유배…‘양경천전’ 지어지기도
 양계초, 일본 통치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 구현 도모…옥고 치러
 양공팔, 제주농업학교 재학 당시 항일 운동 참여했다 구속 고초
 양관, ‘속수읍지’ 등 저술…말년에 제주 사림 영수로 존경받아

▲안치현安致賢:1920(일제강점기)~?, 일본 가라후도(樺太) 탄광에서 항일 활동, 친일 한인(韓人) 배척운동, 본관 순흥.

부친 안두문(安斗文)이 1920년 4월 19일 오사카 북구에서 그를 낳았다. 원적은 산북 구좌읍 한동리(궷-슬), 본적은 산북 용담리(한둑이)이다. 

일본 가라후도(樺太)의 원백군(元伯郡)에 있는 지취탄광(知取炭鑛)에서 토공(土工)으로 일하던 중 장재술(경남)과 “한국에 대한 시국 정책에 편승하여 한국 대중의 문화 향상 도모를 우선해야 할까, 아니면 광범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민족 대중의 독립사상을 앙양시키는 것을 우선해야 할까”하는 것을 논의했다. 

그 결과, 대중의 문화수준 향상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선 대중의 문화수준 향상에 주력한다.”라고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 해 6월 8일 장재술 징역 3년, 안치현 징역 2년 6월의 구형이 있었다. 안치현은 상고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1942년 6월 말 경부터 8월 초순까지는 당시 친일 단체였던 협화회(協和會) 가라후도 지취(知取)지회의 서기인 한국인 마츠모도(松本)가 지회 운영을 하면서 횡포를 부려 동포들의 비난이 집중되는 것을 알고, 장재술과 안치현은 몇몇 지회원을 권유해 마츠모도 배척 간담회 등을 열고 그를 지회에서 추방시켰다. 

그리고 후임에 적당한 사람을 앉히고, 동 지회에서 한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개설해 그들의 민족의식을 배양할 방법을 논의했다. 일제는 장재술과 안치현을 1942년 9월 10일 검거했다.

▲양경천梁擎天:1732(영조8)~1794(정조18), 선비, 본관 제주.

재단법인 고·양·부 삼성사재단이 삼성혈 삼성전에서 탐라를 창시한 삼을나의 위업을 기리고 도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춘기대제를 봉행하고 있는 모습. 양경천은 1785년 2월 유배를 갔다가 귀향하던 중 정조로부터 제주 삼성묘(현 삼성전)의 사액을 받았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재단법인 고·양·부 삼성사재단이 삼성혈 삼성전에서 탐라를 창시한 삼을나의 위업을 기리고 도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춘기대제를 봉행하고 있는 모습. 양경천은 1785년 2월 유배를 갔다가 귀향하던 중 정조로부터 제주 삼성묘(현 삼성전)의 사액을 받았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일도2동 ‘가량-마을’에서 양우조(梁禹祚)의 큰아들로, 세칭 ‘가량 양장의’라 불렸다. 

기절(氣節)로 잘 알려져 조정에 상소문을 올려 시정(時政)을 논했다. 한번은 거스를 말을 올려 함경도 길주(吉州)로 귀양살이를 떠난 바도 있다. 

1785년(정조9) 2월 귀향 중 서울에 들려 제주 삼성묘(三姓廟·삼을나묘)의 사액을 받았다. 이는 정조 임금의 가납(嘉納)으로 대신들과 상의해 어필게편(御筆揭扁)하도록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심재 김석익(金錫翼) ‘양경천전(梁擎天傳)’을 지었다. 이에 절목을 정해 교리 고택겸(高宅謙·1732~?)을 예관(禮官)으로 명령해 삼성사에 치제(致祭)케 했다. 절목은 삼성사에 현판으로 보존돼 있다. 

▲양계초梁啓超:1905(광무9)~1948(미군정시대), 민족종교 미륵교(彌勒敎)의 항일 활동, 일명 양계준(梁啓準), 본관은 제주.

양상원(梁祥元)의 아들로 애월읍 상가리(상-더럭)에서 태어났다. 

미륵교는 강일순(姜一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의 분형(分形)으로 1934년 정인표(鄭仁杓)가 전북 완주군 간중리에서 시작, 동년 1월 천상으로 도통을 받았다고 한다. 신앙의 대상은 미륵불(강일순)이고 석가상과 공자상을 받들고 있다. 

그는 한때 신앙을 단념하고 있었는데 1935년 음력 7월 하순경 김형오(金炯梧)가 내려오자 오라리 월전암(月田庵)에서 변호찬·이두생·양계초·송태옥 등과 함께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했다. 이 신도들은 일본의 통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실현을 구현하고자 했다.

이 일로, 체포돼 양계초(43·상가), 양붕진(梁鵬進·53, 해안), 송태옥(宋泰玉·54·도남), 이두생(李斗生·54·강정) 등은 1943년 2월 16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각각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가 양공팔의 모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있었던 제주시 전농로 일대.
독립운동가 양공팔의 모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있었던 제주시 전농로 일대.

▲양공팔梁公八:1911(일제강점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2차 항일 활동, 본관 제주, 양달행(梁達行)의 아들.

한림읍 대림리(선-돌)에서 태어났다. 1930년 4월 제주농업학교 3학년 김원요(金源堯)는 행사 시 묵념을 거부, 또 양두옥(梁斗玉·신창)과 신창진(愼昌珍)은 황민화(皇民化)교육에 저항심이 있었다. 이에 김원요는 제적을, 또 양두옥, 신창진은 유급 조치됐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동기생들은 흥분했다. 특히 학교의 관례로 해오던 재학생이 졸업생에게 베푸는 송별연마저 금지시킨 데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동기생 양치삼梁致三(대림) 등 9명은 교무실에 들어가 학우의 제적과 유급 조치에 대해 심한 저항을 행동으로 표현해 전원 경찰에 구금되는 사태로 번졌다. 홍성옥, 오화국, 양공팔 등은 붙잡혀 구속됐다. 

또 이두일은 몰래 숨어다니며 화북리 거석(擧石)마을과 조천 등지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기록한 전단을 뿌리거나 붙이면서 활동하던 중에 조천경찰관주재소 소속 순사에게 붙잡혔다. 

더구나 재판에서 불리하게 된 것은 사법 경찰관 직무 취급의 증인 강순극(康淳克) 심문 중 학생 수명이 교장 부인에게 “교장 스기사키(杉崎)를 내놓아라.”로 큰 소리를 치며 난폭한 짓을 했다는 증언 때문이었다.

1931년 8월 1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 판결이 있자 항소해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두일李斗一(평대), 오화국吳化國(18, 하도), 홍성옥洪成玉(19, 귀덕) 등은 징역 10월에 5년간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고 양공팔梁公八(19, 대림)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양관梁觀:1810(순조10)~1868(고종5), 선비, 읍지를 닦은 문인, 호는 청암(晴菴), 본관은 제주.

한림읍 명월리(명월-망)에서 태어나 순조 때에 ‘속수읍지(續修邑誌)를 편저했다. 

본시 박학하고 군서(群書)를 섭렵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을 서울에서 만나 서로 어울리면서 배우고 환대를 받았다. 늘 노사는 그의 박식함을 칭찬했다.

만년에는 제주 사림의 영수(領袖)로서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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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룡 2021-07-08 17:38:46
속수 읍지(續修邑誌)는 헌종 7년(1841)에 김영락(金英樂)과 양관(梁觀) 등이 간행 도감(刊行都監)에서 발간한 ’신수 탐라지(新修耽羅誌)’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신수 탐라지(新修耽羅誌)‘ 곧, 『眈羅誌』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관의 속수읍지를 발간한 시기는 순조 때가 아니라 헌종 때입니다. 이 ’신수 탐라지(新修耽羅誌)‘는 이원조(李源祚) 제주 목사와 관련된 읍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