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보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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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후텁지근한 날씨가 일상을 힘들게 한다. 조금만 활동해도 땀방울이 주르륵 반응한다. 그래도 좋은 시절이라 몇 차례 샤워하노라면 땡볕이 물러선다. 저녁에 동네를 걸을 때면 서늘한 바람이 종종 마중하곤 한다. 이때 느끼는 바람의 맛은 무엇에 비길 데 없이 좋다. 낮의 한증막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인간과는 달리 무더위에 식물들은 신이 나는 모양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지개를 켜며 몸피를 불린다. 나는 마당을 둘러보며 녹색의 향연을 엿본다. 올망졸망 열매를 매단 감나무와 무화과나무에 응원을 보낸다. 농약도 안 치고 방치하여도 제 할 일에 매진하는 모습이 삶의 본보기로 다가온다.

얼마 전부터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건 호박잎에 숨은 주먹만 한 호박이다. 청둥호박의 씨를 꺼내 심었더니 덩굴이 사방으로 자라며 꽃이 피고 진다. 열매를 맺는 건 당연할 것 같지만, 요즘은 씨앗의 유전자를 변형하여 당대에만 결실하는 터미네이터 씨앗이 판을 친다. 이런 경우엔 가루받이 수분을 하여도 속절없이 열매는 떨어지고 만다. 눈에 들이는 호박은 염려하지 말라는 듯 그새 보통 수박 크기로 자랐다. 옛날 초가지붕 위에서 누렇게 익어가던 토종의 씨앗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미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녀석들이 있다. 잔디마당의 잡초들이다. 이놈들은 호시절 만났다고 위풍당당이다. 눈에 띄는 대로 족족 뽑아도 끝이 없다. 쪼끄만 벌레에게도 기겁하는 아내는 무성한 잡초들을 향해 제초제를 살포한다. 결과는 옛날 기계총으로 머리털이 군데군데 빠져버린 모습을 연상케 한다. 시간이 걸릴 뿐, 빈자리엔 잔디가 푸른 옷을 입을 것이다.

자연의 순환처럼 인생의 겨울로 접어든 지인들과 소통할 때면, 하고 싶은 일 하고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살자는 말을 자주 나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가볍게 살자는 의미다. 그래도 나름대로 인생의 지향마저 저버릴 순 없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태어난 건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라지 않는가. 일생의 총화가 태어난 이유라면 나는 긍정의 빛을 채굴하고 싶다.

집에만 틀어박힌 생활이 안타까워서일까, 막내아들은 시간을 내어 바깥나들이를 주선한다. 일전에는 아내와 셋이서 에코랜드를 다녀왔다. 곶자왈이 품는 아늑함에 흠뻑 젖었다. 푸른 숲이며 널따란 호수가 근심 걱정을 모두 맡기라 한다. 청색 자색 흰색의 풍만한 수국과 헛꽃으로 위장한 산수국들의 여기저기서 방싯거린다. 한쪽 밭에선 농기계로 메밀을 수확하는데 그 옆 밭에는 메밀꽃이 흐드러져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몇 장 담았다.

가족이나 연인 또는 친구들이 정겹게 담소하며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채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 일상을 수놓아야 일생도 아름다운 여정일 테다.

빛과 어둠은 서로 기대어 선다는 말이 옹골지게 다가온다. 양면성이 함께하는 것이 세상이고 삶이지 싶다. 그러므로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축복으로 변하기도 한다. 나는 오래전 대상포진과 삼차신경통으로 통증의 진수를 맛보았고, 얼마 전에는 메니에르병으로 지옥문을 여는 심정에 이르기도 했었다. 어지럼 없이 머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임을 깨달았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라는 체험의 명령이라니.

좀 더 여유롭게 바다도 보고 하늘도 바라보며 일상을 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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