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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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수필가

하필이면 이렇게 더운 날 나무를 자르다니. 초여름이라고는 하지만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이다. 구실잣밤나무가 훌쩍 자라 이층 방을 기웃거린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지인들로부터 큰 나무의 키를 낮추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나무를 잘라내는 일에 인색한 남편은 마뜩잖아했다.

나무, 잘라야 할 것 같네요. 옆집 아주머니가 넌지시 던진 말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전깃줄 가까이 가지를 뻗는 나무를 모른 체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른 봄부터 조경하는 이에게 부탁해 두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더니 하필이면 땀이 뚝뚝 흐르는 여름날에 시간을 냈다.

나란히 서 있는 세 그루의 구실잣밤나무는 우리가 집을 짓기 전부터 터를 잡고 자라고 있었다. 봄이면 밤나무 특유의 비릿한 향이 기어코 닫힌 창을 비집고 들어오고 꽃들은 수천 마리의 벌들을 불러들였다. 한여름에는 매미들이 나무 그늘 속에서 온종일 노래했다.

이모, 주워가도 되나요? 알밤 같은 녀석들이 유치원을 다녀오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대문을 활짝 열어주며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더니 다람쥐처럼 통통거리며 밤을 줍는다. 꽃 속으로 떨어진 열매를 주워 찾기 쉬운 곳에 슬그머니 흩어놓는다. 아이들 머리 위로 밤톨 하나가 툭 떨어진다.

분갈이를 마친 꽃들이 모이는 곳도 큰 나무 아래다. 화분을 나무 그늘에 맡겨두고, 물을 가끔 주고 기다리기만 하면 시들하던 아이들이 신기하게도 기운을 차린다. 시름시름 앓다가 기어코 이파리를 떨구는 녀석들이나, 물주기를 제때 하지 못해 말라버린 식물들도 이곳으로 옮겨 놓기만 하면 생기가 돈다. 구실잣밤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은 식물들의 훌륭한 요양소가 되었다.

커피를 한 잔 들고 마당으로 나갈 때마다 가장 먼저 들르는 곳도 여기다. 나무가 내어준 그늘 밑에 작은 의자를 놓고 한참을 앉아 있곤 한다. 상념에 잠기기도 하지만 생각들을 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의자에 앉아서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꽃들과 눈 맞춤 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다. 투둑 하고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나간다. 밧줄에 묶인 큰 가지들이 흙으로 내려온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미련할 정도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에서 급히 시선을 거둔다. 톱밥이 마른 눈물처럼 흩어져 내린다. 전기톱 소리는 온종일 이어졌다. 큰 가지들을 잃어버린 나무가 말없이 서서 해를 등지고 있다. 온 힘을 다해 흙을 붙들고 서 있는 큰 나무, 굽은 등이 훤히 드러난 모습에 괜히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윤기를 잃은 듯한 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름 모를 풀까지 무수한 생명을 키워왔을 나무의 그늘을 잃고 나니 한 수녀님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마음을 다쳤을 때나 몸이 아플 때는 아흔이 넘은 엄마를 찾아가요. 엄마 옆에 가만히 누워서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에너지가 다시 생겨나지요. 복잡한 마음들도 정리가 되니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체구가 작은 노인 곁에 일흔이 가까운 수녀가 아이처럼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져 괜히 혼자 훌쩍거렸다. 나도 그랬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무런 말도 없이 엄마 옆에 가만히 누웠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의 그늘이 밤새 어떤 작용을 한 것일까.

아침부터 후텁지근하다. 늘 해오던 것처럼 차를 한 잔 들고 나무 그늘로 가서 앉는다. 여름날의 따가운 볕이 나를 향해 곧장 내려앉는다. 나무 아래에 있던 물망초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키 작은 수국의 자잘한 꽃들도 입을 꾹 다물어 버린다. 나만 안식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구나. 서둘러 그늘이 생길만한 곳을 찾아 화분들을 옮겨 놓는다. 올여름 매미들은 어디에서 목청껏 울까. 하릴없이 마당을 서성이다 다시 나무 곁으로 슬쩍 다가선다. 이래저래 그늘이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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