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일제 관리 앞에서 내선일체 비판한 강직한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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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덕하, 1738년 과거 급제 후 성균관 직강·전라도 장성 등 역임
 양두옥, 5인 결사 조직해 일본 황민화 교육 반대 등 항일 투쟁
 양명만, 한국어 교육 폐지 부당함에 한탄…평소 민족의식 강해
 양병시, 한림 독서회·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 활동
 양병우, 前 전남대·서울대 사학과 교수…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제주시 조천읍 소재 함덕초등학교 선흘분교장에서 학생들이 비행기 모형을 날리고 있다. 함덕초 선흘분교장의 전신은 1936년 4월 5일 개교한 선흘간이학교로 양명만이 교사로 재직했던 곳이다.
제주시 조천읍 소재 함덕초등학교 선흘분교장에서 학생들이 비행기 모형을 날리고 있다. 함덕초 선흘분교장의 전신은 1936년 4월 5일 개교한 선흘간이학교로 양명만이 교사로 재직했던 곳이다. <사진=제주시교육청 제공>

▲양덕하梁德厦:1714(숙종40)~1775(영조51), 문신, 성균관 직강, 자는 대비(大庇), 본관은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서 양임로(梁壬老)의 아들로 출생, 향공진사 양수영(梁秀瀛)의 양아들로 입양.

제주판관 오명계(吳命季)의 비리가 조정에 보고되면서 1738년(영조14)에 제주순무시재어사(巡撫試才御史) 이도원(李度遠)이 내도, 동년 8월에 과장을 열었다. 그는 이수근(李壽根), 이구성(李九成)과 함께 시취되고 이어 1739년 정시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벼슬은 전적·성균관 직강을 거쳐 외직으로 전라도 장성(長城)의 청암(靑巖)찰방을 역임했다.

▲양두옥梁斗玉:1914(일제강점기)~1966.,본관은 제주, 학생의 제1차 항일 활동, 혁명적 농조(農組) 준비위원회의 항일 활동.

양공백(梁公伯)의 3남으로 한경면 신창리(새-두미)에서 태어났다.

제주농업학교의 재학생들이 1931년 3월 김원요(金源堯·21, 조천)를 제적, 신창진(愼昌珍·18, 월정)과 양두옥(梁斗玉·18, 신창)에게 유급조치를 내렸다. 저항하니 담임은 경찰에게 알렸다.

김원요·양두옥·신창진 등은 3학년이 된 후 평소 소위 일본 천황의 칙어를 학교 의식 때에 봉송(奉誦)을 해도 전혀 묵도하지 않아 교사들로부터 주목받던 터였다.

동년 3월 9일 학교로부터 유급 조치 당한 양두옥과 신창진은 교장실로 찾아가 스기사키(杉崎勝藏)에게 부당함을 항변하고 일본인 교사 모리다(森田親厚)에게 일격을 가했다.

이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학교 당국의 황민화교육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였다.

체포된 양두옥은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3년 3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자동차 조수로 고용됐으나 얼마 후 귀향, 1934년 8월 산남 표선면 성읍리의 실형 집에 기숙하면서 개량 서당의 교사로 재임했다.

1934년 3월 5일 출옥하자 한림리의 항일 운동가 김경봉(金京奉), 신창리 좌응신(左應信·1933년 사망) 등과 동지 김두진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얼마 후 이들 동지들과 5인 결사라는 모임을 몰래 조직,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으로 일제를 타도하자고 결의 맹세했다.

책임자 좌응신, 농민부 양두옥, 소년부 김정맹(金精孟), 연락부 김두진, 학생부 고자화(高子華)가 각기 담당, 항일 투쟁의 방편으로 신창서당에서 이민대회를 통해 우편소(郵便所)를 설치하려는데 저항했다. ‘5인 결사’는 두모·신창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 1932년 5월 1일 노동절에 서당 학생 100여 명을 인솔, 용수리까지 시위한 관계로 고산(高山)경찰관주재소 순사에게 검속됐다.

한편, 신창·두모 양리민(兩里民) 대회에서 신창서당을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려 하자 이는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보아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또 도로 보수에 백성을 동원하자 도로 개설을 반대했다.

양두옥, 김정맹은 이기오(李己五) 댁에 소년소녀 야학소(夜學所)를 개설, 교육을 담당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결국 일경은 1934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80여 명을 검거했다. 양두옥은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이 된 그에게 1993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양명만梁明萬:1901(광무5)~1951, 초등 교장, 한림읍 대림리(선돌) 양사문(梁仕文)의 독자.

일제의 교과 활동에 ‘조선어’ 시간이 학교 교육에서 폐지되자 이의 부당성을 늘 한탄했다.

“달걀을 품고 있는 닭 둥지 속에 꿩알을 갖다 넣으면 같이 부화는 되지만 꿩 새끼는 병아리와 달리 자라 숨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닭에게 쫓겨 달아나 버린다.”라고 비유를 했다.

이로 인해 일제는 양명만 훈도를 사상이 불온(不穩)하다고 해서 벽지학교인 조천면 선흘간이(善屹簡易학교·2년제)로 좌천시켰다.

소위 ‘대동아전쟁’이 극열하던 1943년 당시 제주도주재 시학관(視學官)인 백석(白石·시라이시)은 한림국민학교를 찾아갔다. 일본인인 백석은 전도 교직원을 모아놓고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성전(聖戰)인 대동아전쟁을 이겨야 하며 한국인을 철저히 황민화(皇民化)시켜 일본 신민(臣民)으로 충성을 다하도록 가르치라.”는 요지를 피력했다. 평소 민족의식이 강했던 양명만 훈도는 즉석에서 내선일체론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후일 아들 양창수(梁昌洙)는 이런 사실을 알고 가훈을 치계지리(雉鷄之理)라고 정해 후예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래서 이 집안에는 교감 양창수와 양운진 교수를 비롯해 중등교사 양운택, 양운신과 수사 양운기 등이 배출됐다.

▲양병시梁秉時:1914(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한림 독서회와 ‘제주도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원회’ 활동.

양병시는 일제강점기에 양서운(梁瑞雲)의 3남으로 한림읍 한림리(한-수풀) 1141번지에서 태어났다.

1932년 5월에 연락부를 김경봉으로 하고, 양병시, 문석빈, 장한호 등은 회원으로 가입했다.

1933년 1월 ‘제주도 적농(赤農) 준비위원회’로 이름을 정했으나 동년 10월 활동이 탄로나 62명이 구속됐다. 일제는 ‘적색 농업조합 사건’이라고 했다.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양병시는 독서회를 새로이 조직했다. 1932년 6월 ‘운동자 연구회’의 부서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책임 및 연락부 김경봉, 청년부 양병시, 모풀부 장한호, 부인부 김경봉 등이었다.

항일운동가 이익우(李益雨), 김태안(金泰安) 등의 영향을 받으며 1928년 소년단장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1930년 3월 이익우의 지도에 의해 한림학숙(學塾)의 교사로 재임했다.

▲양병우梁秉祐:1923(일제강점기)~?, 서울대 교수, 애월읍 납읍리(과납) 양기돈(梁己敦)의 큰아들, 양용태의 형, 일본 제3고등학교를 거쳐 경도(京都)제국대학 서양사학과 졸업, 서울대 문학박사.

전남대학에서 초빙하자 사학과 부교수로, 그 후에 서울대학 교수로 전출했다. 한국서양사학회 회장, 1987년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 학술회 회원이었다.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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