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물회
자리물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정영자 수필가

여름날 저녁, 섶섬이 보이는 포구는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활기가 넘친다. 푸른 바다를 코앞에 두고 앉아 자리물회를 먹을 요량이다. 처음 먹는 이들에겐 생소한 맛일 텐데 삼삼오오 모여앉아 재잘거리며 신이 났다. 여행이란 무릇 그 지역의 음식도 섭렵해야 하는 게 이유라면 그들에게 어떤 맛으로 기억될지 궁금하지만, 자리물회 몇 사발 먹다 보면 여름이 지나간다는 제주 토박이가 봤을 때 탁월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여름이 오면 어머니와 함께 보목리로 자리물회를 먹으러 자주 다녔다. 외식이라고 해서 달리 신경 쓸 것도 없이 집에서 입던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가서, 해풍에 절은 갈대발 사이로 불어오는 갯바람을 맞으며 퍼질러 앉아 먹는 자리물회 한 사발. 입맛이 없으셨던지 못이기는 척 따라나선 어머니도 자릿가시를 조심스레 씹으며 맛나게 드셨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오물오물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할아버지 살아계실 적에 어머니가 해 드리던 자리물회가 생각났었다. 자리돔을 정성 들여 살로만 포를 떠서 가늘게 썰어 만든 그 물회에는 자릿가시가 없었지. 아기 손바닥만 한 자리돔을 포를 뜨는 일은 정교한 솜씨가 아니고선 어려운데도 행여나 가시에 걸릴까 쭈그려 앉아 포를 뜨던 어머니. 무더위에 기력 없이 지내는 시아버지를 위해 제주 며느리만이 만들 수 있는 최상의 특식이었을 게다. 정성 가득 들어간 자리물회에 밥 한술 넘기며 무더위를 이겨내시던 할아버지도 저세상으로 가신 지 오래되었고 어머니도 떠나셨는데, 새삼 그 풍경이 오롯이 그려진다.

시끌벅적 소주잔 기울이는 남정네들의 거나한 목소리마저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여름 저녁. 여행 온 이들도 양푼에 담긴 자리물회를 밥상 가운데 놓고 화기애애하다.

제주에 오는 지인들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가을 호박이 익어 갈 무렵에 맛이 가장 깊어진다는 갈치를 넣어 끓인 갈칫국이나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다는 옥돔구이, 여름에는 갓 잡은 자리돔을 채 썰어 갖은 채소와 구수한 된장을 풀어 넣어 만든 자리물회다. 땅과 바다의 맛이 두루두루 조화로운 제주의 토속 음식이다.

제주에서 맛보는 색다른 맛에서 섬사람들의 기질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권하지만, 자리물회를 처음 먹어보는 이들 중에는 익숙지 않은 맛에 고개를 젓는 이들도 있다. 특히나 날된장으로 제주 본래의 맛을 살린 물회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자리물회를 먹을 줄 알면 제주 사람이 다 되었다는 말이 생겨난 건지도 모르겠다.

냄새가 기억을 끌어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자리물회와 함께 나온 자리젓의 구릿한 냄새에는 어둑한 부엌의 연탄 아궁이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의 맛이 진하게 베여있다. 그 맛의 꼬리를 물고 과거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다 보면 눈부신 어린 시절의 환영 속에 서 있곤 한다.

자릿배가 들면 동네 골목에는 등짐을 진 자리 장수들이 ‘자리 삽서, 자리 삽서’외치고 다녔다. 그런 날 저녁 밥상에는 자리물회와 조림이 올라왔다. 회나 구이용에는 들지 못하는 자잘한 자리로 짭조름하게 조린 조림은 회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 몫이었다. 가시가 폭삭하니 삭아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식욕을 돋우어 주었다.

한가로운 저녁이면 마당에 나와 앉아 먼 하늘 별빛을 바라보며 나누어 먹던 자리물회.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자리회나 ᄒᆞ영 갑서.’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정 깊은 목소리에 이웃이 모이고, 둥근 밥상에 둥글게 둘러앉아 이야기꽃 피우며 먹던 그 시절은 먼바다 불빛처럼 아스라이 멀어져 꿈에서나 만나질까.

한 생애 동안 제주바당 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자리돔처럼 억척스레 자리 지키며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의 맛은 구수하면서도 삼삼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진솔하다. 어린 입맛에 깊은 맛도 모른 채 먹으며 나를 키운 그 촌스러운 맛이야말로 오래 음미해야만 알 수 있는 토종의 맛이요 고향의 맛이 아니런가.

이 저녁, 비릿한 바닷바람 가르며 들려오는 정겨운 고향의 소리.

“삼춘! 자리물회나 ᄒᆞᆫ 사발 줍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