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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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경 수필가

한가할 때면 가끔 새로운 골목을 찾아 걷곤 한다. 옆 동네인데도 가보지 않는 먼 곳에 와 있는 것 같다. 조금은 낯선 길. 나는 그 작은 설렘이 좋다. 살다 보면 다니던 길로만 다닌다. 둘러 다닐 생각은 애당초 하지 않는다. 매일 같은 행동만 할 것이 아니라 한눈을 팔아야 일을 낸다.

성내천을 따라 걷다 보면 시에서 도의 경계까지 이르기도 한다. 자연 생태 하천이라 처음 보는 식물들이 많아 지루하지 않다. 이끼 낀 돌 위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 드문드문 억새밭이 있고 벚나무가 줄지어진 이 길은 전에도 온 적이 있는 것 같다. 10여 년 전에 다녔던 화실 부근인 듯하다. 화실이 낡은 건물 2층이라 뒷집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붓을 씻으려고 베란다로 나가면 대추나무와 해바라기가 손에 잡혔다. 덜 익은 대추 몇 개를 따먹기도 하고 나무에서 말라버린 해바라기를 직접 보며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집과 닮은 붉은 벽돌집을 만났다.

반쯤 열려진 대문 사이로 붓꽃이 한창 피어있다. 마당의 반이 시멘트로 덮여 있어서 땅이 모자랐는지 붉은 대야로 된 화분에도 일년초가 가득하다. 막다른 골목 안 나란히 앉은 두 집만 다른 분위기이다. 서로 의지가 되어 옛날 집을 유지하고 있나 보다. 신축 아파트와 빌라가 대부분인 동네에서 오래된 두 집. 몸을 담는 그릇인 집이 닮아 있으니 집 주인의 취향도 같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둘째마저 대학에 들어가자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좋은 그림을 보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다. 다른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유명한 그림보다는 내가 그린 그림을 집에 걸어 두고 싶었다.

흐린 날 그림 그리다가 테레핀 냄새가 많이 날 때면 동네를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밝은 날보다 더 세세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적당히 낡은 그 동네는 색깔이 바랜 담벼락마저도 주위 풍경과 아주 잘 어울렸다. 내가 사는 동네와는 달리 과거의 추억이나 세월이 묻어있었다. 그 시절에는 마음이 속속 드러나는 글보다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그림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식구들이 외출하기 바쁘게 화실에 나갔다.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리다 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아이 같은 설렘이 나를 들뜨게 했다. 학교 다닐 때는 긴 앞치마에 물감을 잔뜩 묻히고 그림에 열중하는 친구들이 멋있어 보였다. 미술실에 들어가 뒤에서 엿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끌리는 마음이 곧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보이는 것만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색감이 참 좋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몇 년이 지나자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화실이 있던 곳에 오니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같이 그림 그리던 사람들이 그립다. 제주도에 주로 있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내 속에 숨어 있다가 글 속에서 빛나는 묘사가 되기도 하고 참신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처음부터 글을 썼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는데

그런 아쉬움도 있지만 입문한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열정을 가지고 얼마나 자주 썼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글이 잘 안 풀릴 때 무작정 길을 걷는다. 그러면 내 안의 조급하던 마음이 풀어지며 차분해진다.

낯선 길은 어쩌면 지나온 길과 닿아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림과 글쓰기가 서로 통하듯이 서로의 본질은 연결되어 있다. 실력이 늘지 않아 갈증을 느낄 때, 고여 있는 물처럼 지루할 때, 낯선 길을 찾아 나선다. 길을 걷다가 문득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보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기쁘다. 꼬리를 문 생각들이 나를 옛날로 데려가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사람들이 불현듯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낯선 골목길에는 보물이 널려있다. 지나가면서 주워 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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