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女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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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지난 7월 31일 밤, 왜 그를 여제라 하는지 목도했다. 5세트 접전 끝에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이 숙적 일본을 꺾고 대망의 8강 진출에 성공했다. 막판에 일본이 침몰했다. 그야말로 쫓고 쫓기는, 물고 물리는 대역전극이었다.

불과 한 달, 발리볼 내셔널리그에서 3-0으로 완패했던 한국이 짜릿한 승리를 낚아 올린 중심에 배구 여제 김연경이 있었다. 나이 들어도 그는 산(山)이었다. 우뚝 솟은 산, 흔들리지 않는 큰 산이었다. 앞에선 무서운 파괴력으로 상대 진영을 흔들고, 후위에선 몸을 던져가며 공을 받아 건져 올렸다. 때리고 넘어오면 가로막고 공격과 리시브를 넘나들었다. 세터가 공을 처리하게 높이와 거리를 잰다. 자신을 집중 견제하는 상대의 손을 용케 뿌리쳐 가며 강약과 완급 조절이 리듬을 탔다. 기어이 일본의 기를 꺾어 놓고 마는 서릿발 같은 카리스마.

그는 일본의 코트를 맹렬히 두드렸고, 그에 힘입어 2012년 런던올림픽 이래 계속 8강 진출이라는 배구의 역사를 쓰게 했다.

첫 세트에서 우리가 이긴다고 직감했다. 김연경이 여유 있게 웃음을 띠었고, 일본 선수들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눈여겨보는 순간, ‘아, 이번엔 우리가 이긴다.’ 했다. 김연경 선수에게 압도돼선가 저희 안방인데 일본 선수들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김연경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고비마다 득점하며 선수들을 향해 외쳤다. 경기장 안을 흔들었을 것이다. 일본 코트를 집 마당처럼 누볐다. 국내 경기장에서 보여주던 대로 그는 포효했다. “할 수 있다, 해보자, 포기하지 말자, 우리는 절대로 포기 안 한다.” 그리고 득점 뒤, 두 팔 벌려 코트를 돌며 휘젓던 굵고 크고 역동적이던 퍼포먼스. 그 거침없는 경기 현장의 연희(演戲), 그것이 일본 팀의 기를 꺾어 놓았다.

그가 한일전 직전에 말했다 한다. “간절했다.”고. 간절함은 절실함이다. 뼛속에 사무침이다. 이 한마디 말속에는 ‘한일전, 쌓이고 쌓인 적대감, 설욕, 8강, 메달’ 등의 의미가 함축됐을 것이다. 가위 바위 보에도 질 수 없다는 한일전 아닌가.

정말 설욕하고 싶었을 것이다. 리우올림픽에서 일본에 져 동메달을 놓쳤다. 또 한 달 전 이탈리아에서 열렸던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셧아웃 완패해, 잠을 쫓으며 응원을 보냈던 국내 팬들을 얼마나 실망시켰나.

그는 이번 한일전에서 무서운 폭격기로 변신해 있었다. 득점 30점으로 양 팀 최고점을 올렸다. 5세트는 백미였다. 치고받다 막판에 위기에 몰렸다. 11대 13, 이어 13대 14. 한 점이면 우리가 무너진다. 숨을 딱 멎게 하는 순간, 멈춘 듯 살아났다. 박정아 선수가 연거푸 3득점으로 듀스를 만든 뒤 경기 종료. 살얼음을 밟고 선 듯 아슬아슬한 형국에 시청자들이 숨을 몰아쉬었을 것이다.

승리의 여신이 우리 편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오늘 여기까지, 김연경 선수가 선수로서 걸어 온 길은 실로 험로였다. 10여 년간의 오랜 프로 생활(터키) 뒤 흥국생명으로의 전격 복귀 그리고 국내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해 낸 뒤, 세 번째 올림픽 출전과 8강 진입….

그는 패색이 짙은 예선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매조지어 온 국민을 열광하게 했다. 코로나19 속, 열대야에 부대끼다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김연경 선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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