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전기 도입·상수도 설치…고향 발전 물심양면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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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원하, 애월읍 출신…독립운동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해
 양유성, 전라도 보성 군수 역임…‘탐라사절’ 중 한 명으로 지칭
 양을, 제주검찰청 검사…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됐다 무죄 선고
 양인수, 제2대 제주도의원 당선…하예동에 화평전분공장 설립
 양재종, 재일교포 11명과 부지 20만 평 후원해 애월상고 이전
 양정규, 국무총리 수석비서관으로 정치 입문해 국회의원 6선
수업을 듣고 있는 애월고등학교 학생들. 양재종은 1984년 5월 애월상고(현 애월고등학교) 이설 추진 재일교포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금의 애월고는 양재종을 포함해 교포 11명이 후원한 20만 평의 애월읍 고내리 부지 위에 세워졌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수업을 듣고 있는 애월고등학교 학생들. 양재종은 1984년 5월 애월상고(현 애월고등학교) 이설 추진 재일교포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금의 애월고는 양재종을 포함해 교포 11명이 후원한 20만 평의 애월읍 고내리 부지 위에 세워졌다. <사진=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공>

 

▲양원하梁元河:?~1945(일제강점기), 미륵교(彌勒敎) 교도 항일 활동.

애월읍 상가리(상-더럭)에서 태어났다. 신앙의 대상은 미륵불(강일순)이고 석가상과 공자상을 받들고 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7월 16일 타계하니 조국 광복되기 1개월 전이었다.

▲양유성梁有成:1684(숙종10)~1761(영조37), 무신, 군수.

제주시 화북동(벨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날 때 긴 무지개가 하늘에 이어져 상서로운 기운이 방에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양유성은 뒷날 무과에 급제하고 전라도의 보성(寶城)군수를 역임한 바 있다.

흔히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 해서 풍수(風水)에 고홍진(高弘進), 의술에 진국태(秦國泰), 복무(卜筮)에 문영후(文榮後), 풍채에 양유성 등을 지칭한 말이다.

1760년(숙종46) 양유성, 김우천(金羽遷), 김우달(金羽達), 김여강(金汝江) 등의 건의로 ‘급제선생안’을 작성, 이는 1558년 시행한 무오방戊午榜부터 무과에 급제한 총 338명의 이름을 기록한 문건이다. 이 ‘급제선생안’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돼 삼성사에 보존돼 있다.

▲양을梁乙:1915(일제강점기)~?.

제주지방검찰청 검사, 남원면 위미리(뙤미)에서 태어났다.

일본 ‘리츠메이캉(立命館)’대학 전문부(專門部) 법학과를 졸업했다. 1946년 ‘제주도사법요원시험’에 합격, 1949년 2월 26일 그는 제주도검찰청에 부임하려다가 28일 오전 모 기관에 체포돼 제주도로 압송(押送)됐다.

동년 3월 23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주도검찰청에서 대검찰청 김윤수(金潤樹) 검사로부터 기소됐다.

법령 19호 위반, 내란음모 및 방조혐의로 3월 14일 제주에서 구속된 후 5월 30일 광주지검으로 이송된 전 제주지검 검사 양을(35)에 대한 언도공판은 31일 상오 10시 광주지법 제1호 법정에서 송화식(宋和植) 부장판사 주심(主審), 기세훈(奇世勳) 차장검사 입회 아래 개정돼 송(宋)판사로부터 피고에 대해 무죄가 언도됐다.

치안국과 연락해 제주도검찰청과 경찰청에 양(梁) 검사의 체포를 해제하고 즉시 대검찰청에 돌려 보내줄 것을 대검찰청에서 전문(電文)으로 시달했다.

동년 3월 5일 김효석(金孝錫) 내무부차관은 “양을(梁乙) 검사 대리는 제주 근무 당시인 1948년 10월경 모종(某種) 범죄사건의 관련자로 판명되어 제주지방법원 판사가 발부한 정식 구속영장을 제주도경찰국 국원(局員)이 수령 후 그 영장을 집행한 것으로 정당한 법적 근거에 의거하여 집행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3월 4일부(附) 모모지(某某紙) 등의 왜곡(歪曲) 보도하고 있는데, 일반은 이에 유혹되지 말기를 바란다.”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1949년 3월 상순 현직 검사 양을은 제주도소요사건 관련 혐의로 서울검찰청에서 경찰관에게 체포돼 제주도로 이송되던 중 송청(送廳)됐으나 현지 근무 검사라 제주지방법원에서는 심의 곤란하다고 해서 13일 광주지방법원으로 이송(移送)했다고 한다.

▲양인수梁仁洙:1911~1983, 제주도의원, 사업가.

안덕면 대평리(난-드르)에서 천호공파(千戶公派) 양태규(梁泰奎)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강성익 도지사 당시 남제주군 내무과장을 지내고 안덕면장을 3년간 역임했다.

1956년 8월 13일 제2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얻었다.

이후 중문면 하예리(열리)에 화평전분공장을 설립한 바 있다.

제주국제대 교수 양승주(梁昇柱) 박사의 선친이고 ‘카메리아 힐’ 관광지를 창업한 양언보(梁彦保)의 숙부이다.

▲양재종梁在宗:1931(일제강점기)~2007 고내, 재일교포 사업가, 애월상고 이설추진위원장.

고내리(고내-망) 양두병(梁斗柄)의 둘째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했다.

1984년 5월 애월상고 이설 추진 재일교포 위원장이 돼 양띠(신미辛未생) 고내 교포 갑장회 회원 11명과 부지 20만여 평을 매입, 고내리 지경으로 이설을 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후원을 한 바 있다.

앞서 도쿄에 거주, 가죽제품 제조업체인 주식회사 ‘마루요시(丸吉)’를 창업했다.

1972년 고내리에 전기를 가설할 때에도 거액을 희사했고 상수도 시설을 만들 때 전액을 부담했다. 이에 이민 일동의 이름으로 ‘재일교포 양재종 공덕비’가 세워졌다.

재일본 고내리 친목회 양회(羊會·신미생)는 회장 김화석(金貨碩) 외 회원 고원정(高元正), 오창화(吳昌華), 홍영천(洪永川), 장용해(張龍連), 오영범(吳永範), 고창화(高昌和), 장찬옥(張燦玉), 오창렬(吳昌烈), 홍인택(洪仁澤) 등이다.

양띠 양재종은 1989년 12월에 모교인 애월중에도 거액을 쾌척하니 송덕비가 구내에 건립됐다.

▲양정규梁正圭:1933(일제강점기)~2011, 6선 국회의원, 헌정회 회장, 여당 부총재.

조천읍 함덕리(서산)에서 태어나 부인 오정식과 사이에 3남 1녀가 있다.

어린 시절 기능직으로 고학하고 만학으로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했다. 한양대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석사를 받았다.

1964년 국무총리 수석비서관으로 입문해 7·9·12·14·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에서 두 차례 원내 총무, 한나라당에서 부총재와 상임고문을 지냈다.

16대 대선 때는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자문회의 의장으로 최측근이라 불렀다.

한국권투위원회 회장과 세계권투협의회 부의장을 맡았다.

국회한일의원연맹 간사장, 한·이란의원친선협회장, 한·모로코의원친선협회장을 역임했고 제주복지회 회장을 맡았다. 2009년 대한민국 헌정회 제16대 회장에 이어 17대 회장으로 있었다.

정부의 충무무공훈장과 보국훈장을 받았다.

무소속의원회와 국민당 등 제주 출신 선량(善良)으로서 막후 교섭의 실력자로 인정하는 분이 둘이니 이는 산남의 현오봉(玄梧鳳) 의원과 산북의 양정규 의원이라고 자타가 인정했다.

2011년에 타계하니 동 10월 15일 국회에서 헌정회장(憲政會葬)으로 영결식을 엄수했다. 저서로는 ‘탐라의 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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