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避暑)·내서(耐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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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하늘에서 활활 화기(火氣)를 쏟아붓는데 바람 한 점 없다. 훅훅 치고 올라오는 지열, 불 지핀 한증막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올여름 폭염은 그냥 더위가 아니라 벌겋게 불붙는 불잉걸 속이다. 7월 들어 비 몇 차례 지적이더니 마가 걷혔다. 늦게 오더니 온데간데없다. 지각하더니 맘대로 조퇴해 버렸다. 32도는 붙박이, 폭염경보로 펄펄 끓는 날이 이어진다. 어느 기상캐스터의 말이 재치 있었다. “코로나19보다 무서운 게 폭염입니다.”

이럴 수가, 가만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옴짝하기도 싫은데 손에 무엇이 잡힐까. 능률 없는 일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런다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난감하다. 시간은 가는데 불더위 속에 멈춰 있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고역도 없다. 낮잠도 어디로 달아났는지 까무룩 헷갈린다. 날씨가 어지간해야지 방정맞게 웬 잠인가.

더위에서 벗어나는 게 피서고 해내면 내서인데, 떠나야 하나. 그렇다면 떠날 방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몸이 처진 형편에 어디를 어떻게 가느냐에 이르러 단순찮은 게 내가 딛고 선 현실이다. 너무 엄연하니 함부로 하지 못한다. 더욱이 늙은이 두 사람의 나들이이고 보면 챙기고 따지고 갖추갖추 갖춰야 할 것들이 적잖을 것이라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전에 자주 가 숲 그늘 평상에 길게 누워 까마귀 울음소릴 듣던 곳이 있었구나. 절물자연휴양림. 몸이 받쳐주지 않아 발길 끊긴 지 언제인가. 그마저 헤아리지 못하겠다. 궁리뿐 실행은 어렵다. 젊은이들 같으면 며칠 여름휴가를 틈타 놀러 가는 게 피서일 텐데, 그 축에 끼지도 못한다.

실은 놀고 있다. 일 년 열두 달을 눕거나 다리 길게 벋고 편하게 지낸다. 생각 나름이다. 먼 데를 돌아오는 피서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노선버스를 타 아침에 갔다 해 한 발쯤 남겨놓고 와 몸 씻고 나서 저녁놀을 마주할 수 있는 거리의 그 어느 곳. 그늘 짙고 바람 좋은 데다 물 흐르는 계곡을 떠올린다. 우거진 나무 그늘이 여름 햇살 가려 주고 숲속이라 일조시간도 짧고 계곡물 흐르니 더위를 느낄 겨를 없는 그곳.

쉽잖을 것이지만, 일단 계획은 잡아 놓아야지. 계획은 꿈으로 가는 것인데. 신은 지 오래된 신장의 신발이라도 볕을 쬐야지. 걸음이 따라주지 않을 텐데, 신발은 아내가 사 준, 그때 발 편하던 그것으로 해야 한다.

아. 절물자연휴양림에는 ‘탁족(濯足)’하는 곳이 있었다. 한라산 기를 담아 내리는 물이 촬촬 소리 내 흐르는 그곳. 정강이 걷어 올리고 발 담가 앉으면 더위는 삽시에 사라지고 만다. 공상일지라도 꿈은 꾸어야겠다.

더위를 식히는 음식으로 냉면, 냉국, 콩국수를 먹거나, 이열치열로 뜨거운 음식을 먹어 땀을 흘리면서 몸을 보한다고 보신탕과 삼계탕을 즐겨 먹는다. 나는 탕 쪽이다.

옛날엔 정초부터 더위 먹지 않게 기원하는 주술적 풍습이 있었다. ‘더위 팔기’. 이른 아침에 서로의 이름을 불러 무심결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게.” 외쳐 더위를 팔면 그해엔 여름내 더위를 먹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한다. 소박한 시절의 순박한 삶이 녹아 있던 세시 풍속도였다.

피서하며 여름을 견뎌 내면 내서다. 제일 손쉬운 게 있겠다. 대야에 찬물 펑펑 부어놓고 두 발 담근 채 선풍기 바람에 수박 한 조각 입에 넣으면, 금상첨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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