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물허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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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명숙 수필가

물레에 놓인 점토를 양손으로 감싼다. 두 돌 된 손녀 엉덩이 매만지듯 미끈하다. 온몸의 세포들도 손동작에 따라 숨을 내쉰다.

체험장에는 제주의 옹기가 잿물을 입히지 않고 구워, 겉면이 거칠고 윤기가 없는 질그릇과 오지그릇들로 가득하다. 그중에 붉은빛이 연하게 도는 황토색 물허벅에 눈길이 머문다.

소풍 가는 아이의 심정이 이럴까. 설레는 마음은 낮달이 되어 들뜨고 초여름의 더위도 잠시 잊는다. 강사는 제주옹기에 적합한 흙의 분포지역 배경 설명도 놓치지 않으며 푸근한 인상이다.

성격은 숨길 수 없는가 보다. 막내는 천천히 즐기면서 꼼꼼하고 섬세하게 빚는다. 작업자들 안에서 속도를 맞추려고 허둥대는 나를 보더니, “요리를 잘 안 하시나 봐요.”

걸머리. 행정구역은 아라이동이며 기자촌을 지나면 내 어머니의 태생지. 이른 봄의 보리처럼 푸른 필름이 뇌리에 화석으로 앉아 있는 곳. 그 풍경은 아담하다.

초등학교 시절 냇가를 지나 산비탈을 넘어 할머니 댁에 당도하면 해는 서산으로 기울었어도 내외분은 밭일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언니와 마루를 닦고 물허벅을 등에 지고 공동 수돗가로 향한다. 길어 올린 물허벅을 부엌 초입 물팡에 내려놓고, 물항아리에 물을 옮기려고 보면 가득 채웠던 물이 골착해(비어)진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 찰랑찰랑 물이 넘쳐 옷 젖는 줄도 모르고. 걸레질을 마칠 무렵이면 허허허 웃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음성이 가까워진다. “어멍이 보냈구나. 어멍은 잘 이시냐. 이루제 니네 크민 한걸 허켜.”

맏며느리로 시집간 딸이 보고 싶고 걱정하시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으니.

물허벅, 허벅의 명칭은 허벅다리, 허벅지 모양에서 땄다고도 하고 몽고의 가죽물병인 허버에서 왔다고도 한다. 청정한 여름밤 하늘에 별은 유난히 빛나고 달빛은 허벅의 빗살무늬처럼 맑고 또렷했다. 방학엔 외가에 나들이가 잦았다. 농사일이 바쁜 어머니가 틈을 낼 수 없으니 친정집 그리움에 우리를 대신 보냈으리라.

여고 시절, 수학여행 가게 되었을 때. 경비가 없어 갈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별천지인 서울을 보고 싶어 어머니를 졸랐다. 한 달 동안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으면 외할머니로부터 돈을 빌려서 보내준다기에, 어머니의 제안을 따른다.

식구들이 단잠에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 졸리는 눈을 비비며 재래식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졸다가도 서울을 떠올리면 졸리던 눈꺼풀도 번쩍 뜨이곤 했으니. 내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지 싶다.

그 시절 설핏한 들길에 산 그림자가 어리면 왜 그리도 무섭던지. 머리카락이 곤두서곤 해서 언니와 잡은 손에 힘을 더 주게 된다.

공작 시간에 찰흙을 접해 본 지 50여 년, 그 몰입의 시간. 아이로 돌아가 점토를 두 손바닥 사이로 송편 빚듯 조물조물 주무른다. 잡념을 비우고 집중하라는 강사의 말에 자세를 가다듬는다. 어르신들은 나에게 무엇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느긋하신 성품에, 말주변이 없어 훈장일은 하지 않으셨다던 할아버지. 건강하셨던 육신은 문턱을 넘다 낙상하여 일주일 만에 삶에 낙관을 밟으셨고, 외할머니도 102세의 장수를 누리시다가 지친 몸을 쉬시게 되었다. 어느 날 그 터에 발길이 닿았다. 인적 없는 고택에는 감나무 한 그루만이 지나간 소리를 듣고 있는 듯 사위가 조용하다.

투박한 걸머리의 물허벅은 할머니가 살아오신 흔적, 나의 성장 씨앗을 발아하고 어루만져주신 가슴. 지금은 생명수가 되어 어머니의 건강을 염원해주시는 큰 바위 얼굴이다. 물기 머금은 흙이 물레 위에서 돌고 있다. 할머니의 물허벅이 물레에 얹힌다. 외할머니의 혼이 담겨있는 물허벅,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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