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말 한마디로 적군 돌려보낸 제주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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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정훈, 1851년 명월만호…정의현성·제주성 보수 감독 맡아
 양제박, 항일 운동에 앞장…1960년 제9대 제주도지사 임명
 양제하, 제주판관·수군첨사 등 역임…곡식 희사해 기민 구제
 양제해, 순조 때 관리 횡포에 대항에 민란 모의하다 붙잡혀
 양종창, 제주 삼신이 화살 맞췄다는 돌 보존할 석실 만들어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정의읍(현)성 남문 전경.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양정훈은 1853년 4월 정의현성 성첩과 문루가 무너져 대보수를 할 때 감독을 맡았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정의읍(현)성 남문 전경.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양정훈은 1853년 4월 정의현성 성첩과 문루가 무너져 대보수를 할 때 감독을 맡았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양정훈梁廷勳:1806(순조6)~1865(고종2), 무신, 만호, 호 송계(松溪), 본관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났다. 헌종 때에 무과에 급제, 1851년(철종2) 3월부터 동년 12월 말까지 명월만호로 있었다. 사람됨이 걸출해 당시의 사람들이 호랑이 또는 양호(梁虎)라고 불렀다.

1840년(헌종6) 영국 군함이 가파도에 침입, 대정현감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자 양정훈이 문정관(問情官)으로 나타나 적전에서 의연하게 말하니 그들이 감복해 퇴거했다.

그는 ‘범천총’ 김용우(金用雨), 신성흠(愼性欽), 부도일(夫道一), 이최영(李最榮) 등과 함께 ‘제주 다섯 호랑이’라고 일컬어졌다.

1851년(철종2) 3월 장석좌(張錫佐)의 후임으로 명월만호에 부임하고, 동년 12월에 그만뒀다.

1853년(철종4) 4월 정의현성 성첩과 문루가 전부 무너져 대보수를 할 때 감동역(監蕫役)을 맡아 목사가 포가지전(褒嘉之典)을 조정에 상신한 바 있으며 또 1856년(철종7) 주성의 문루 및 관청 건물의 보수 감독을 맡아 동년 4월 이를 마쳤다.

▲양제박梁濟博:1886(고종24)~?, 정치가, 미군정 시 입법의원, 사업가, 제9대 제주도지사, 본관 제주.

한림읍 대림리(선-돌)에서 태어나 보성(普成)학교를 거쳐 경성전수학교(경성법학전문 전신)를 졸업했다.

1927년 민족단일전선 신간회 인천지부를 양제박과 곽상훈 양인이 주도해 조직, 1946년 10월 26일 남조선과도정부의 입법의원(한국민주당 소속)에 민선으로 당선, 국회의장인 곽상훈의 추천으로 1960년 5월 10일 제9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됐다.

1913년 제주지방재판소 서기, 1920년 제주물산주식회사 전무, 1925년에 조선기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20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가 서울에서 결성될 때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 죽암(竹巖) 고순흠(高順欽), 남농(南農) 홍순녕(洪淳寧) 등과 함께 가입, 이때 양제박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인천으로 옮겨 불교협회와 신정회(新正會)를 통해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

1945년 광복 후 같은 해 10월 31일에 미 군정하의 인천시 고문으로 추대됐다. 경기도 의원 6명 중 한 의원으로 중앙 정계에 투신했다. 또 한국민주당 인천지부 사무국장을 거쳐 부위원장이 돼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돌입했다.

▲양제하梁濟厦:1837(헌종3)~1904(광무8), 무신, 제주판관, 수군첨사.

‘관풍안(觀風案)’에는 양제하(梁濟夏)라고 기록돼 있다.

주성(州城) 동문밖 도련촌(道連村·도련-들)에서 태어났다. 1863년(철종14) 무과에서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전라도 장흥군의 벽사찰방(碧沙察訪)·장성군의 청암찰방(靑巖察訪)·경상도 경주영장(慶州營將)·전라도 부안군 격포진(格浦鎭) 수군첨사 등을 역임했다.

1876년(고종13) 8월, 이조현(李朝鉉)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79년 2월에 교체됐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곡식 437섬을 흔쾌히 내놓아 굶주리는 주민을 구제한 일로 1879년 8월 조정에서 특별히 포상을 내렸다. 이는 제주목사 백낙연이 조정에 상신한데 따른 조치였다.

양제해 묘비.
양제해 묘비.

▲양제해梁濟海:1770(영조46)~1814(순조13), 제주 민란 주도, 제주면 풍헌(風憲), 본관은 제주, 제주시 아라동(아라위)에서 양정섭(梁廷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제해는 조선 순조 때 제주목 중면中面(현재의 제주시·읍)의 풍헌을 지낸 제주의 토호였다.

평소 제주도에 도임해 오는 목사나 판관 등 경래관(京來官)들의 탐욕과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제주인들의 처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다가 마침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에 크게 고무돼 제주도에서도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서 보내오는 관리들을 몰아내고 제주인들 스스로 자활해 나갈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관리들과 상찬계(相贊契)를 조직해 친목을 도모하면서 김익강(金益剛), 고덕호(高德好), 강필방(姜必方) 등 관리들을 포섭하고 많은 장사들을 규합하는 한편 병기와 군량도 준비했다.

그는 동지들과 모의해 1813년 12월 16일 야반을 기해 제주·정의·대정 등 3읍에서 일제히 무력 봉기하기로 했다. 목사와 판관·현감들을 죽이고 모든 관아를 장악한 다음 내륙지방과의 교통을 일체 차단해 제주인들에 의한 자치체제를 확립해 도민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해 나가기를 결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거사 며칠 전날 윤광종(尹光宗)에 의해서 고발됐다.

제주목사 김수기(金守基)는 곧 군사를 풀어 양제해를 비롯한 일당 50여 인을 체포했다.

양제해는 붙들린 직후 탈옥해 도주했으나 다시 붙들려 목사의 형장(刑杖)을 받다가 사망했다.

▲양종창梁宗昌:1767(영조43)~1821(순조21), 선비, 삼사석(三射石) 석실(石室)의 감동역(監蕫役), 자는 창보(昌甫), 호는 매포(梅圃), 본관은 제주.

제주시 화북동(벨도) ‘거로-마을’에서 태어나 그릇됨이 컸다.

삼성신화(三姓神話)를 간직하고자 1735년(영조8) 제주목사 김정(金晸)이 화북촌 경내 일주도로변에 삼을나가 복지(卜地)할 때 사시(射矢)한 유허지에 비석을 세운 바 있다.

목사 김정은 비명(碑銘)에 ‘毛興穴古 矢射石留 神人異蹟 交映千秋(모흥굴 옛적, 화살이 돌에 멎은 세 을나의 자취여! 천년이나 비추네)’라고 썼다.

1812년(순조12) 삼사석(三射石) 보존을 논의하자 그는 먼저 감동역을 맡고 전 만호 고익보(高益普·도련), 전 군관 부찬빈이며 ‘진위현지(振威縣誌)’에 다음과 같은 부찬빈(夫贊彬) 등과 함께 석실을 만들어 길이 보존할 수 있게 했다.

양종창은 화살 맞았다는 전설적인 돌을 모아 석실 좌우의 석주(石柱)에는 판석을 세워 ‘三神遺蹟 歲久殘斂 今焉補茸 加以石室(삼을나 자취 오랜 돌을 모아 석실안에 간직하고 이제 닦아 석실을 마련했네)‘라 쓰고 밑 도리 판석에는 ‘嘉慶癸酉春石室’이라고 그 연도를 표시했다. ‘嘉慶癸酉’는 1813년(순조13)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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