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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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근본도 없는 것이!

이 말이 유난히 가슴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본’이라는 한자말은 글자의 뜻대로는 나무의 뿌리라는 뜻에서 사물이 발생하는 근원 또는 모든 것의 기초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 없듯 조상 없는 후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부모 잃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뿌리에 얽혀 정체성이 모호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신고하려니 호적이 없어

“호적을 떼어볼 일이 없었습니다. 학교를 다녀봤나 어디 직장이란 걸 다녀봤나. 남편이 결혼신고하려고 보니까 호적에 올라가 있지도 않았던 겁니다. 기가 막혔죠.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 없이 살아온 것도 서러웠는데 아무도 호적에 올려준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남의 집 애기업개나 하면서 밥을 얻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호적을 떼어볼 일도 없었고 그런 생각도 못해봤던 거죠. 남편이 내 호적을 만들어주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고생을 했습니다.”

▲친형제인 줄 알았는데 사촌이라니

“철이 든 후에야 양자로 올라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복자인 나를 놔두고 어머니는 재가해버렸답니다. 친부모를 아예 모르고 자란 거죠. 큰아버지 집에서 허드렛일은 다 내가 했어요.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동생들 돌보느라고 학교도 못 다녔어요. 당연히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왜 나만 하느냐고, 왜 나만 학교 안 보내주냐고 말을 못했어요. 큰집에서 키워주고 결혼도 시켜줘서 고맙지만 죽기 전에 친아버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어느 순간 간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친자확인소송을 하겠다고 했더니 가족들이 말렸습니다. 큰아버지의 작은아들이 제 아버지의 양자로 족보에 올라가서 아버지 제사도 지내고 있고 아버지의 4·3유족으로 결정되었거든요. 버젓이 아버지의 핏줄인 내가 살아있는데도 나는 큰아버지의 딸이 되어있고 큰아버지의 아들은 제 아버지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겁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반대의견을 듣고 보니 내 아버지를 찾겠다고 지난 세월의 가족관계를 깨뜨릴, 그런 용기가 없더군요. 눈물로 아버지 찾는 걸 포기했습니다.”

▲일흔이 넘어서야 아버지를 찾은 할머니

“5촌 삼촌의 딸로 일흔 살까지 살아야 했습니다. 4·3토론회에 갔다가 자료집에 나와 있는 4·3희생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는 순간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자관계 부존재 확인을 시작으로 이모와 유전자(DNA) 대조검사를 통해 친모관계를 입증하고, 치매를 앓는 고모까지 법정 증인으로 세워서 친부 관계를 최종 인정받는 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근본을 찾는 일

4·3은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건입니다. 4·3 당시 인명피해나 재산손실 못지않게 여자라는 이유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경우 특히 어린 딸들은 집안 어른들에 의해 삼촌의 호적이나 동네의 마음씨 좋은 아무개의 호적에 넣어 수양딸로 보내졌습니다. 말이 딸이지 애기업개나 식모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근본 없다’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왈칵 쏟는 이 사람들에게 ‘근본’을 이제는 찾아주어야 합니다. 명품과 짝퉁의 차이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4·3으로 인해 ‘근본’ 없이 살아온 여자들의 근본을 찾는 일,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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