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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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종일 내리던 비가 저녁에도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자리에 누워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뒤척였다. 언뜻언뜻 내 의식의 날개는 빗방울을 따라 가뭇없이 흘러가다, 말갛게 깨어나곤 한다.

종일 에어컨 바람에 시달려 머리가 무겁다. 더운 열기는 한풀 꺾였지만 후텁지근한 바람으로 쉬이 잠들지 못한다. 만물이 어둠에 잠긴 시간에 듣는 빗소리는 나지막한 피아노 소리처럼 정겹다. 애쓰게 잠을 청하기보다 이 순간을 즐기며 사유의 숲을 소요한다. 무엇이든 기다리는 일은 일방적인 짝사랑과 같아, 애태울수록 더 멀어진다. 눈을 감고 베개를 높이 고여 심신을 집중하면, 명상에 든 것같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불면의 밤을 보내려면 한여름 밤의 신기루 같은, 허망한 꿈이라도 꿔 보는 것도 좋겠다.

저 비의 언어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할 수 있다면 어떤 어휘로 나열할까. 머릿속에 물감과 자판기를 펼친다. 그림을 구경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리는 재주는 영 없다. 물감을 확 풀어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추상화 한 폭 될 수 있을까. 내 사유의 뜰은 열기로 달뜬다.

턴테이블이 딸린 덩치 큰 오디오기를 처분하고 후회를 많이 했었다. 요즈음은 그 자리를 유튜브가 채워줘 음악 감상에 푹 빠져 지낸다. 피아노곡은 불면증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통통 튀는 얌전한 빗방울 소리를 연상시키는, 비 오는 날은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어울린다. 쇼팽이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작가인 연인 조르주 상드와 요양 차 지중해 마요르카섬에서 머물 때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다. 외출해 돌아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며 작곡한 것이다. 간절한 기다림은 추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악상으로 연결했다. 초조했을 쇼팽의 마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서정적인 곡이 내가 연인을 기다리는 것 같은 애잔한 마음에 젖는다.

불을 밝혀 책을 볼 수도 있지만, 밤에는 일상의 모든 일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되도록 시계도 보지 않고 밤이 깊어 간다고 안달하지도 않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갈 뿐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떠오르거나, 언제 한 번 가본 것 같은 낯익은 풍경 속에 홀로 서 있곤 한다. 공상의 씨줄 날줄로 이리저리 이어보다 머릿속에 글 한 줄 써넣거나 대궐 같은 누각을 짓다 허물고. 그러다 선선한 새벽바람에 스르르 늦잠에 들면, 더없이 달콤한 단잠에 빠진다.

더위로 지친 이들이 새벽잠에 곤히 빠진 시간, 훌훌 털고 일어나 한가한 공원 숲을 걷는다. 수국과 어울려 아가판서스가 한창이더니, 요즈음 부용과 맥문동꽃이 만개했다. 새벽바람에 한들거리는 보라색 춤사위가 눈부시다. 이슬 머금은 그들의 모습을 휴대전화에 담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장마철에 기분을 밝게 해주는 꽃이 능소화다. 먼 길을 돌아 그 곁으로 가곤 했던, 복스러운 소녀 같은 얼굴로 칙칙한 풍경을 환하게 밝히는 꽃이다. 지금쯤 탐스럽게 만개한 능소화가 비로 시달리겠구나. 축대 아래 붉은 낙화가 낭자하게 널브러져 있을 텐데. 귀한 꽃이 길바닥에 누웠을 것 같아 마음 쓰인다. 아침에 먼저 그곳으로 가리라. 한 움큼 주워 베란다 행운목 곁에 뉘어 줘야지. 여름 동안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 그 사위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작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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